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말의 애매성을 이용한 전형적인 소피스트의 논변이 무려 21가지나 나온다. 웬만한 인내심이 아니면 계속 읽어나가기가 어려울 정도다. 어찌 보면 너무 시답지 않은 말장난을 지나치게 벌이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말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논변이 이어지다 보니 우선 주제가 너무 산만하게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지혜의 실체를 규명하려던 대화가 온갖 논변으로 이리저리 튕겨 나간다.
주요 등장인물과 대화의 구도는 2명의 소피스트인 에우튀데모스와 그의 형인 디오뉘소도로스가 소피스트적 논변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들에 맞서 논의의 실체를 규명하려하면서 긴장 관계가 조성된다. 여기에 소피스트로부터 교육을 받게 되는 소년 클레이니아스와 그를 사랑하는 젊은이 크테십포스가 등장하여 조연 역할을 한다.
전체 구도는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대담 속에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 일행과 대담했던 내용을 전달해 주는 ‘액자 속의 액자’의 형식, 즉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소크라테스와 두 소피스트와의 대담은 초기에는 매우 우호적으로 진행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두 소피스트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대화를 이끌어 간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간에 대화를 전개해 나가는 의도와 방식은 확연히 구분된다.
▲ 소크라테스 좌상, 아테네 국립학술원 앞에 있다. ⓒ박경귀 |
“그러자 디오뉘소로도스가 말했네.
“소크라테스, 당신이 지금 말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주의하고 있습니다. 결코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말했네.
“어떻습니까? 당신들은 그가 지혜롭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까?” 그분이 말했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지금 클레이니아스는 지혜롭습니까, 아닙니까?” 그분이 말했네.
“‘아직까지는 아니다’라고 그는 말하죠. 그는 허풍쟁이는 아니죠.” 내가 말했네.
“당신들은 그가 지혜롭게 되기를, 그리고 무지하지 않기를 바라고요?” 그분이 말했네. 우리는 동의했네.
“그러면 당신들은 그가 그이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한편, 현재의 그인 사람이 더 이상 아니기를 바라시는군요.” 그러자 나는 듣고 어리둥절해졌네. 내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그분이 끼어들어 말했네.
“지금 그인 그가 더 이상 아니기를 당신들이 바란다니, 그러면 당신들은 그가 죽기를 바랄 뿐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자신들이 사랑하는 소년이 죽어 없어지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친구와 그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니, 그와 같은 이들이 정말이지 퍽이나 가치 있겠습니다.”
이 논변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골치를 썩은 애매한 단어를 활용한 대표적인 궤변이라고 한다. 번역자는 그리스어 ‘einai(to be)’를 ‘있다’와 ‘~이다’로 동시에 사용하게 됨으로서 궤변을 낳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역자가 이 단어의 쓰임이 어느 구절에서 어떻게 이중적으로 쓰이며 궤변을 낳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주석하고 있지 않아서 애매어를 이용한 논변의 세부 대목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굳이 희랍어 원전에서의 활용이 어찌되었는가를 모른다 해도 대화의 맥락적 이해를 통해 우리는 디오뉘소도로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궤변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어리둥절했던 것은 당연하다.
소크라테스는 디오뉘소도로스가 가르치는 학생 클레이니아스가 지혜로워지기를 원한다고 했다. 디오뉘소도로스는 현재 그가 완전하게 지혜롭지 않은 상태에서 지혜로운 상태로 변한다는 것은 현재의 그가 아닌 다른 그가 되는 것이므로, 소크라테스가 “그가 죽기를 바랄 뿐이라고 봐도 되겠”다거나, “소년이 죽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한 것이다.
디오뉘소도로스는 소년의 이전 속성이 다른 속성으로 변하면서, 이전 속성이 소멸되는 것을 소년의 존재 자체의 소멸로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소년이 지혜로운 자로 변하길 원한 것이지 누가 소년이 죽기를 바란 것인가? ‘무지를 갖고 있던 인간’이 지혜로워져 더 이상 ‘무지가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을, 속성 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도 상실하고 마는 즉,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는 것은 틀림없는 궤변이다.
소피스트들은 이런 식으로 말의 애매함을 이용하는 방식이나 수식 어구를 생략하는 방식, 구문의 주어인지 목적어인지 구별하기 애매한 구절을 이용하는 방식 등 결국 말꼬리를 잡는 다양한 방법으로 궤변을 전개한다. 그런 사례가 무려 21가지나 전개된다.
▲ 플라톤 좌상이다. 아테네 국립학술원 앞에 있다. ⓒ박경귀 |
특히 사람들을 지혜롭고 훌륭하게 만들기 위한 왕의 통치술까지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제가 철학과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을 넘나든다. 따라서 궤변 그 자체에만 매몰되지 않고 대화에서 독자가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저작이다. 역설적이게도 궤변에 대한 대응 논리를 궁구하게 하는 교재로도 더 없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이 책은 마치 소피스트들의 궤변의 수법을 총체적으로 대중에게 고발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이들의 억지 궤변이 모두 소개된다. 놀라운 것은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에게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들의 궤변을 끝까지 들어준다는 점이다. 그는 소피스트들에게 상당히 관용적이다. 그가 친구 크리톤에게 한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욕망에 대해서는 그들을 이해해 주어야 하고 화내서는 안 되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는 생각해야 하지만 말이지. 왜냐하면 분별에 관련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하고 용기 있게 나서서 싸우며 공들이는 사람은 그게 누가 되었든 그 모든 사람을 아껴야 하기 때문일세.”
물론 소크라테스가 그들의 궤변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의 논변 가운데서 소피스트들이 자신들이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는 지혜로운 자라는 오만한 주장에 날카로운 풍자를 날린다.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 당신들의 말에는 아름다운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고매한 점은 당신들이 많은 수의 사람들이나 소위 비범한 사람들, 또는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당신들과 닮은 사람들에만 관심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화려한 논변의 허위성을 신랄하게 고발함으로써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지혜와 얼마나 격이 다른가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 소크라테스의 궤변의 다양성을 모두 노정시키도록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듣는 입장을 취했다. 소크라테스가 한 가지 한 가지 논박하다 보면 대화 자체가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장기인 문답법을 통한 소피스트와의 대결을 피하고, 소피스트들의 궤변을 독자들이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방치한 느낌도 든다. 이는 플라톤이 이 작품에서 소피스트들의 주장의 모순과 궤변을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의도를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로 오해 받고 나아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을 곱씹으면서, 통속적 소피스트들과 확연히 달랐던 스승의 면모를 복권(復權)시키려 이 작품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에우튀데모스(Euthydemos)>, 플라톤 지음, 김주일 옮김, (2011, 3쇄), 18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