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우 기자 |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우정’이 가능할까? 최근 한미일 삼국 간의 줄다리기를 지켜보면 문득 사마천 ‘사기(史記)’ 중 관포지교(管鮑之交)가 떠오른다. 관중의 말을 들어보자.
“가난하던 시절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 몫을 더 크게 가져왔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또 내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에도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세 번 벼슬길에 올랐다 번번이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전쟁터에 나가 세 번 모두 패하고 도망쳤을 때에도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 비웃지 않았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이른바 ‘보수’ 진영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볼멘소리가 유독 자주 들려오는 듯한 건 기분 탓일까. 반미친중(反美親中) 노선에 대한 우려가 점점 그 질량을 불려가는 인상이다. 이 가운데 2주 뒤인 14~18일 박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한다(정상회담은 16일).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출국길에 오를까.
한미관계, 더 정확히는 한미동맹의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는 지난달 17~18일 방한했던 존 케리 국무장관의 '글로벌 파트너십'이라는 두 어절 속에 담겨 있었다. 이 말을 그저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는 의례적 의미로 읽기에는 케리의 언급이 매우 잦고 집요했다는 지적이다. 외교부장관 공관에 들어가 처음 쓴 방명록을 비롯해 가는 곳마다 '글로벌 파트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 미국을 미워하는 것도 일본을 싫어하는 것도, 나아가 둘의 '찰떡궁합'을 못마땅해 하는 것까지도 자유다. 미국의 요구라고 다 들어줄 까닭도 없다. 허나 냉엄한 현실을 도외시한 채 추구한 자유엔 만만찮은 대가가 따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만큼만 나라의 안보는 지켜진다는 것 또한 변치 않는 사실이다. 박 대통령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사진=연합뉴스TV 캡쳐 |
이 말의 속뜻을 꿰뚫기 위해서는 한 번쯤 미국의 관점에서 국제정세를 살필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현안은 역시 IS다. 이 패악무도한 집단과의 결전이 무혈(無血)로 성사되리라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우크라이나 문제와 기후협약 이슈 등을 추가한다. 미국의 바람은 명확하다. 이 복잡한 정세에 한국이 함께 나서주는 것이다. ‘이제부터’ 파트너가 되자는 미국의 제안에는 현재의 한미동맹이 가진 비대칭성, 그러니까 미국이 한국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관계라는 일침이 숨어 있다.
대한민국은 더운 피를 요구하는 미군의 IS 대응작전에 어디까지 동참해 줄까. 50년 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는데 말이다. 그 시절 한국은 미국 주도의 질서에 궤를 맞춰 ‘동맹다운 동맹’의 무게를 확인시켜 줬다. 베트남전 참전은 백 마디 립서비스를 압도하는 '피의 증표'였던 것이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 한미동맹은 다시 한 번 관포지교의 증거를 요구받고 있는 건 아닐까. ‘영혼 없는 동맹’이 아니라 정신(精神)까지 함께 해줄 수 있는 전우(戰友)의 역할을 기대 받고 있는 건 아닐까.
냉철한 현실주의 논리 안에서 엮고 엮이는 국가 간의 동맹을 마냥 아름다운 우정에만 비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파트너’란 고상한 단어 속에도 국익의 관점을 숨겨놓는 게 외교다. 다만 주사위가 던져진 지금, 적어도 미국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상황만은 막는 편이 한국에게 좋지 않을까.
“나를 낳은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이지만, 나를 아는 것은 일본뿐이다.”
미국을 미워하는 것도 일본을 싫어하는 것도, 나아가 둘의 '찰떡궁합'을 못마땅해 하는 것까지도 자유다. 미국의 요구라고 다 들어줄 까닭도 없다. 허나 냉엄한 현실을 도외시한 채 추구한 자유엔 만만찮은 대가가 따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만큼만 나라의 안보는 지켜진다는 것 또한 변치 않는 사실이다. 박 대통령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방미는 2주 앞으로 다가왔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