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 복거일 소설가 |
교황 비오(Pius) 12세를 시복(諡福)하고 궁극적으로 시성(諡聖)하려는 교황청의 움직임은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그래서 1965년에 시작된 시복 과정이 아직도 마무리되지 못한 형편이다. 얼마 전에 한 역사학자가 '히틀러의 교황’이란 제목을 단 비오12세의 전기를 펴내자, 이 일에 관한 논의가 다시 달아올랐다.
20세기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교황인 비오12세는 본명이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로 1876년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1939년부터 1958년까지 교황을 지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어려운 시기에 천주교회를 잘 이끌었으므로 복자와 성인을 갖추었다고 주장한다. 현 교황 요한 바오로(Johannes Paulus)2세는 특히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한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그가 파시즘 정권들에 지나치게 호의적이었고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엔 나치 정권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침묵했다는 사실을 기리킨다. 『히틀러와 교황』은 그 점을 날카롭게 추궁한다. 그의 행적에 대한 비판은 실은 오래전부터 나왔으니, 프랑스의 천주교 작가인 프랑수와 모리아크(Francois Mauriac, 1885~1970)는 그런 비판자들 가운데 두드러진 사람이었다.
파시즘 정권들과 관련된 비오 12세의 행적 자체는 또렷해서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는 1930년대에 무솔리니 정권과 히틀러 정권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이었고, 적어도 드러내놓고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엔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았지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에게 나치 독일의 야만적 행위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침묵했다. 1943년 10월 바로 교황청이 자리 잡은 로마에서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몰아서 가축 수송용 트럭들에 태워 수용소로 끌어 갈 때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1944년 여름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이 물러났을 때, 헝가리에선 5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 가스실로 보내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 야만적 범죄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비오 12세의 지지자들까지 위의 사실을 인정한다. 논란이 이는 것은 그가 그렇게 침묵한 까닭에 관해서다.
지지자들은 그가 침묵한 데엔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런 사정은 그의 침묵을 정당화하거나 적어도 그의 잘못을 덜어준다고 주장한다. 비판자들은 그런 주장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인다. 왜 그는 나치의 야만적 범죄들에 대해서 그렇게 고집스럽게 침묵했을까?
근본적으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기술한 것처럼, “파시즘 체제는 천주교회에 호소력이 없지 않은 몇 가지 특징들을 지녔었다.” 파시즘 체제는 권위, 질서 및 위계와 같은 관념들에 바탕을 두었고, 각종 단체들을 기본 단위들로 삼아 사회를 조직하려는 단체주의(Corporatism)를 내세웠고, 가정을 중요시했다. 무엇보다도, 파시즘 체제는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마지막 요인은 특히 큰 무게를 지녔었으니, 1930년대에 천주교회는 공산주의가 자신들의 최대의 적이라고 여겼다. 자연히, 교황청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정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다.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1세 아래서 국무장관을 지낸 파첼리는 특히 그 일에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그는 나치 독일과의 협약(Concordat)을 추진하여 1933년엔 협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비오 12세는 권위주의적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개인적으로 파시즘 체제에 호의적이었고 특히 히틀러의 권위주의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그가 처했던 상황 아래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상 가장 사악안 정권인 나치 정권을 맞아, 많은 선량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무척 당혹스러웠고 뒷날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안타깝게도, 파첼리는, 국무장관으로서나 교황으로서나, 그렇게 행동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지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천주교회의 힘과 권위를 지키고 늘리는 것이라고 여긴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속세의 강력한 권력과 맞부딪쳐 교회의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써야할 사람들은 천주교도들이지 유대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자신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나치는 천주교도들을 박해할지 모른다고 그는 걱정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이탈리아의 천주교도들에게 유대인들을 숨겨주라고 은밀히 지시했다.
비오 12세처럼 어려운 시절에 책임이 큰 자리를 맡았던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무척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그의 시복과 시성에 대한 논란은 오래 이어질 듯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황이 역사상 가장 오래 존속해온 기관이고, 자연히, 천주교도들은, 특히 교황들은, 긴 기억과 깊은 역사의식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교황의 역사는 영광보다는 굴욕이, 득의보다는 고난이 훨씬 많았던 역사였다. 그런 역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신의 대리인 노릇을 하기 위해서, 교황들은 어쩔 수 없이 속세의 권력과 타협해야 했다.
그것은 언제나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책임과 권한이 커지면서, 교황들은 속세의 권력자의 면모를 지니게 됐다. 그래서 12세기의 류시우스(Lucius)2세는 혁명을 일으킨 로마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다 부상해서 죽기까지 했다. 비오12세는 군대를 갖지 못한 군주였다. 그에겐 권위는 있었지만, 힘은 없었다. 그를 평가할 때, 그 사실은 꼭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