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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침'과 '북침' 사이, 오해는 '용어'에서 비롯됐다

2015-06-26 17:5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정소담 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동틀 녘에 떠진 눈이 어쩐지 계속 말똥하다. 머리맡엔 그의 회고록이 있다. 아직 주변이 어두워 글자가 잘 읽히진 않지만 괜스레 몇 장을 휘휘 넘겨본다. 아흔여섯에서 내 나이를 빼보니 예순 아홉. 그와 나 사이에는 대한민국의 나이보다도 조금 더 많은 세월이 있다. 조국보다 연로한 어떤 노병과의 점심약속이 있던 날. 올 1월, 용산 전쟁기념관 내에 있는 집무실에서 백선엽 장군을 뵈었다.

할아버지 고향이 함남 어디라고 하니 전쟁 중 그 지방을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왠지 모를 죄책감은 국사 시간에 졸았던 기억 하나까지도 느릿느릿 끄집어낸다. 멋쩍게 웃으며 “장군님, 젊은 사람들이 역사를 잘 모릅니다”하니 “잘 모를 수 있지”하시며 나직이 웃어주시는데 그 웃음이 어찌나 따스한지 거기에 노병도 외조부도 대한민국의 발자취도 다 있었다.

50대들도 6.25가 남침인 걸 모른다? 용어 혼동일 뿐

마침 최근에 젊은 세대의 한국사 인식에 대한 설문조사가 있었다. 잡코리아가 성인남녀 1193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이 설문에서 20대의 절반은 ‘6.25 전쟁이 남침’인걸 모른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젊은 세대가 아무리 역사를 모른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 얘기다.

   
▲ '20대의 절반이 6.25전쟁이 남침인걸 모른다'는 설문 결과는 용어의 혼동에서 비롯되었다. /사진=윤서인 조이라이드 캡쳐

그런데 설문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니 좀 이상하다. 비단 20대뿐 아니라 30대, 40대, 50대의 경우에도 오답을 말한 응답자가 각각 40.4%, 29%, 17.9%나 있는 것이다. 20대를 제외한 청장년층에서도 ‘6.25는 남한이 북한을 침략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황당한 결과는 왜곡된 역사의식이 아닌, 언어의 혼동이 빚어낸 사태였던 것이다. ‘남침’이면 남한을 침략했다는 건지 남한이 침략했다는 건지 혼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남침’과 ‘북침’의 구분에 예민한 건 동족상잔의 비극을 빚어낸 책임자를 분명히 하는 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익숙지 않은 단어의 사용이 오히려 혼란과 왜곡을 가중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국민다수를 혼동시키는 한자어 대신 사실관계가 드러나면서도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한 다른 어휘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 1947년에 만들어진 이유

‘언어 문제’를 풀고 나면 ‘진짜 역사문제’는 오히려 그 다음에 있다. ‘광복연도’를 묻는 질문인데, 일단 설문의 정답은 1945년이었지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논점이 발생한다. 진정한 광복조국이 이루어 진 해는 1948년으로 보는 편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1945년에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건 맞다. 하지만 이 땅에서 일본을 몰아낸 것은 미국이었다. 우리 민족은 그때부터 3년간 미군정(美軍政)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친숙한 동요의 원래 가사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인데,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는 우리가 독립한 해로 알고 있는 1945년으로부터 2년이 지난 1947년이다. 1947년까지도 우리 민족은 아직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미군정으로부터도 해방되어 비로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은 1948년 8월 15일.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세상에 지난 역사를 공부하는 건 그다지 흥미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인지 우리는 꼭 알아야 하는 것까지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 이상한 현실을 살고 있는 것도 맞다.

‘진짜 건국’ 70년을 앞에 두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뭘까. ‘진영논리’가 아니라 ‘진영논리의 극복’일 것이다. 좌우대립에 매몰돼서는 결코 역사를 올바르게 짚어낼 수 없다.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도 지양해야 한다. 역사논쟁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특히 용어에 대한 논박인데 소모적 논쟁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조선일보에 연재중인 웹툰 ‘윤서인 조이라이드’의 ‘건국칠십년’ 1화를 보면 용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만화는 초등학생 자녀가 학교에서 받아온 통신문에 등장하는 ‘6.25전쟁의 다른 이름은 한국전쟁’이라는 내용과 ‘북한군의 진격’과 같은 표현 등을 지적한다. 전쟁의 책임자가 드러나지 않은 중립적인 표현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으나 위와 같은 표현에 분노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국민이며 그렇지 않으면 세뇌된 혹은 위험한 사람이라는 식의 접근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 조국보다 연로한 어떤 노병과의 점심약속이 있던 날. 올 1월, 용산 전쟁기념관 내에 있는 집무실에서 백선엽 장군을 뵈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용어에는 침략 주체가 드러나 있지 않으니 김일성의 범죄사실이 더 명징하게 드러난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타당한 주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국민을 ‘비정상’으로 몰아세울 근거는 되지 못한다. ‘왜곡된 표현’이 아닌 ‘가치중립적’인 표현에 대해 분노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답을 말했다고 해서 “여기에 분노해야 정상적인 국민”이라고 말하는 만화가 불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히려 위험한 건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선량한 시민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태도다. 공영방송에서도 ‘건국 70년’이라는 잘못된 표현이 버젓이 등장하는 게 현실인데 올해가 ‘건국 67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의심당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6월 26일부터 기억해야 할 것들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을 태운 배가 침몰해도 좌우대립으로 비화되고 전염병에도 정치논쟁이 등장한다. 좌파 혹은 우파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더러 거짓말 말라고 몰아세우는 지경이 됐다. 세상만사의 복잡다단한 속성상 한 극단이 아닌 어느 지점쯤의 의견을 말하면 비겁하단다. 멋대로 중도 무슨파라는 이름을 붙이며 왜 애매한데 서있냐고 손가락질도 서슴지 않는다.

양극단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일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끄는 건 균형을 잃은 채 대롱대롱 한 극단에 매달려있는 이들이 아닌, 균형감각을 가지고 합리적인 사고를 해나가며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백선엽 장군과의 대화에서 ‘전쟁’보다 많이 나온 단어는 ‘이해’였다.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우리는 ‘조상님이 노할 일’ ‘순국선열이 피눈물 흘릴 일’ 등의 표현을 자주 쓰곤 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문득 반성하게 된다.

같은 민족끼리 총 끝을 겨누는 애달픈 역사의 복판에 있던 선조들이 그린 2015년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냉전이 종식된 지 수 십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진영논리와 흑백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외눈박이들의 나라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6월 25일은 지났지만 6월 26일부터의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아직 많다. /정소담 칼럼니스트, 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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