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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연평해전'…우리 모두가 갚아야 할 빚

2015-07-08 11:01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김소미 교육학 박사·용화여고 교사
영화 <연평해전> 관객이 350만 명을 넘었다. 상영 2주 만에 거둔 성과다. 연평해전의 선전 탓에 대작인 쥐라기공원과 터미네이터가 의외로 고전 중이라고 한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필자도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는 도입부를 지나 2002년 6월 마지막 주로 빠르게 흘러갔다. 축구 경기장에서 대형 태극기가 응원단석 위로 올라가는 장면은 필자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영화는 스스로가 잊고자 했던, 그 모순을 후벼파는 듯했다. “저런 사이 군인들은 포탄 속에서 산화해 갔지.”

2002년 6월 26일 오전 10시 25분. 참수리-357호정은 NLL을 넘어 대한민국 영해를 침범한 북한 고속정 등산곳 684호의 진입을 막기 위해 차단기동에 들어갔다. 참수리호는 교전수칙에 따라 급선회하며 선체로 북한 고속정의 진입을 차단하려 했다. 배가 급격히 흔들리자 의무병 박동혁 상병은 순간적으로 갑판에 붕대와 약품을 떨어뜨렸다. 붕대를 줍던 그가 멈칫하며 하늘을 보던 순간 적의 포탄은 참수리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순간 정장(艇長)이었던 윤영하 대위는 공격 명령을 끝내 거부한 작전관을 향해 “그러면 어쩌란 말이야. XXX” 소리치며 절규했다. 그의 절규와 함께 북한 고속정이 쏜 85mm 포탄은 지휘실을 타격했고 윤 대위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장병들은 대응사격을 했다. 병사들의 피가 튀고 살이 튀었다. 선제공격을 당한 참수리호는 침몰했다. 6명이 죽고 19명이 부상당했다.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해 회복할 것 같았던 박동혁 상병은 끝내 숨졌다. 한·일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으로 떠났다는 뉴스를 바라보는 윤영하 대위 아버지의 눈빛이 날카롭다. 병원 장례식장 TV뉴스로 전해지는 이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였다.

   
▲ 영화 연평해전 포스터.
<연평해전>은 우리가 몰랐던 점을 많이 알려주었다. 해전 발발 일주일 전 국방부는 ‘명령만 내리면 발포하겠다'는 북한 해군의 확실한 도발정보를 입수했다. 하지만 수뇌부는 도발 의지가 없다고 정보를 조작했다. 이후 참수리가 격침된 후 북한 경비정을 추격하던 해군에게도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도발 정보를 보고했던 한철용 소장은 나중에 징계를 당했다. 보고를 받은 라포트 한미연합사령관은 다음 날 남재준 연합사부사령관 등 정보 참모들을 대동해 국방부 청사를 항의 방문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NLL을 둘러싼 비극은 다음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2007년 다시 영해를 침범한 등산곳 684호에 경고 사격을 하였다는 이유로 당시 국방부장관이 물러났고 정보본부장이 사실상 강제전역 당했다. 교전수칙에 따라 차단기동을 시행한 애꿎은 장성들을 희생자 발생의 원흉으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NLL을 수호하기 위한 행동을 취한 장성들은 줄줄이 옷을 벗어야 했다.

통일부장관까지 나서 “서해 교전 당시의 방법론을 반성해야 한다”며 6인의 전사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은 햇볕정책이라고 포장된 김대중-김정일 간 6.15 선언 이후 벌어졌다.
NLL을 ‘미군이 땅따먹기하기 위해 그어 놓은 선’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못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NLL을 사수하다 전사한 장병의 추모식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당시의 선제공격이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10년이 지나서야 은근슬쩍 공식 인정됐다.

<연평해전>은 어느 기업 하나 제작에 관심 가져주는 곳 없이 10여 년 표류한 끝에 7000여명의 국민 성금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의 흥행 질주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처절한 전투 속에서 전우부터 살리는 전우애와 가족애는 실화로서의 완성도를 높였다.

   
▲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제2 연평해전 13주기를 맞은 29일 국방장관으로서 첫 추모사를 밝히면서 전투를 ‘승전’으로 규정했다. /사진=연합뉴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눈물도 쏟았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극장을 찾은 옆자리 관객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영화를 영화로만 봐달라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부탁은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었다. 나라가 외면했던 영웅들이 이끈 비참한 승전을 확인했다.

일본에서 월드컵 결승전을 즐겁게 보고도 전사자의 영결식장 한 번 찾지 않은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의 행동은 비겁한 지도자의 모습이었고 유족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적이 도발해도 “먼저 공격하지 말라”는 대통령의 명령은 아들을 해군에 보낸 박동혁 상병의 어머니를 ‘아들을 맞아 죽게 만든 죄인’으로 만들었다. 아들을 보낸 뒤에도 미행과 감시까지 당해야 했다. 한상국 중사의 부인은 이런 나라가 너무 싫어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그동안 외면으로만 일관해왔던 지난 정권의 인물들이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서해교전이라 부르던 이들이 제2연평해전이라 고쳐 불렀다. 연평해전은 6인의 장병들이 몸을 바쳐 NLL을 지켜낸 이긴 전쟁임을 강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장병들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사죄는 없었다. 이들을 순직자에서 전사자로 승격하겠다는 말은 이제서야 나오고 있다. 이마저도 국회 국방위에서 불협화음을 내며 부결됐다. 유족들은 상처는 더 깊어졌다.

공자는 “이름을 바르게 해야 한다”며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언어가 순리로 통하지 않고 언어가 순리대로 통하지 못하면, 그 어떤 일도 성사되지 않는다”고 정명(正名)을 강조했다. 모든 문제는 이름을 잘 못 쓰는 부정명(不正名)으로부터 비롯된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은 북한 공산군의 남침에 대항해 싸운 것이지, 그냥 ‘한국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다. 때문에 6.25남침 전쟁이라 불러야 정확하다. 모든 논란은 항상 바르지 못한 용어에서 발생한다.

연평해전의 희생자들은 나라를 위해 죽어간 전사자다. 연평해전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랑스러운 6인의 영웅이 총알받이가 되어 NLL을 지켜낸 비참한 승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비참한 희생을 숭고한 희생이라고 거짓말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자 후원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올라와 스크린을 채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본명이 아닌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닉네임이 있었다.

젊은이들이 <연평해전>을 많이 찾았다. 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 젊은이들이다. 이들 한 명 한 명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사실로 깨어나기 시작한 연평해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연평해전>은 우리 모두가 갚아야 할 빚이다. /김소미 교육학 박사,용화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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