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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우의 day by day] ‘자본론’ 독파한 소년병, 박현채 사망 20년

2015-08-17 17:33 | 이원우 차장 | wonwoops@mediapen.com
   
▲ 이원우 기자

2015년 8월 17일은 ‘빨치산 경제학자’ 박현채의 사망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경제를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의 대립으로 보았던 이분법 경제학의 대부. 소련 붕괴에 대한 얘기만 들으면 침울해졌다는 한 남자. 그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빨치산 소년병사 조원제의 실존인물이기도 하다.

박현채는 1934년 11월 3일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산 중턱의 할아버지 박화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소년 박현채의 정신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꼽히는 사람들은 이미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고 있었던 이모부와 당숙 등이다. 특히 이모부는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박헌영과 함께 활동했다.

주변 교사들도 그에게 영향을 줬다. 광주 수창초등학교 교사 최충근이 소년 박현채에게 줬던 책은 모택동을 찬양하는 ‘중국의 붉은 별’(에드거 스노우)이었다. 박현채는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0대에 이미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파한 이 소년은 이미 한 사람의 천재 공산주의자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 건국 초기 대한민국의 상황은 요동치고 있었다.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을 통과하며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는 중학생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조직 관리에 힘쓰고 있었던 박현채에게도 일련의 행동을 요구하는 현실이었다.

   
▲ 경제학자 박현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70년대 경제이론 '대중경제론'의 기초를 쌓은 인물이다.

내전에 준하는 상황, 반란군이 지리산 일대로 들어가 유격 활동을 전개하는 현실을 보며 결국 박현채는 소년 빨치산의 길을 선택한다. 1950년 10월, 6·25 남침 4개월이 경과한 시점에 박현채는 자발적으로 빨치산 광주지구 부대원이 된다. 그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이 시절의 선택을 박현채는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해방 이후 김일성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는 것은 그에게 부여된 또 다른 숙명이었다. 하지만 평양 김일성대학까지 뻗어있던 그의 꿈은 서울대학교에서 멎었고, 그는 좌파 경제학계의 거두로서 생전에 어마어마한 양의 글을 썼다. 특히 박현채가 1978년 출간한 ‘민족경제론’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당시 캠퍼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박현채 사상의 핵심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공동체(코뮌) 정신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본주의의 핵심인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담론이다.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고 유토피아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유토피아’라는 단어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박현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논지에 공감한 사람 중엔 전직 대통령도 있다. 15대 김대중 대통령이다. 1970년 초 월간 ‘사상계’에 글을 수록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은 박현채에게 ‘대중경제론’의 골격을 의뢰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 1971년에 발표된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다.

둘의 공조관계는 1990년대 무렵 끊어진다. 대선이 있었던 1992년 박현채는 김대중 후보가 ‘뉴 DJ플랜’ 등의 공약을 내놓자 더 이상 그를 보좌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정태인 前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2007년 8월 오마이뉴스 인터뷰 내용). 박현채에겐 자신의 구축해온 학문적 세계의 단단한 경계 밖으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무렵 그를 둘러싼 모든 현실이 그의 이론을 부정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한 인간의 내면에 강인한 신념이 존재할 때 그 인간은 위대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명제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 신념이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양심적인 판단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류(誤謬)의 방향으로 평생을 박력 있게 달려갔던 이 남자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생각해 보게 되는, 2015년 8월 17일은 그런 날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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