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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숙제…시리아 난민 '강 건너 불' 아니다

2015-09-25 16:42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
전세계 역사학자들에게 역사상 민족의 이동이 세계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대표적 사례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아시아계인 '훈족(흉노)'의 서진(西進)을 꼽을 것이다.

중세가 채 열리기 전 세계의 중심이던 유럽에 동쪽으로부터 밀어닥친 훈족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이어졌다. 강인한 훈족을 견디지 못하고 지중해 연안으로 남하한 것이다.

비슷한 일이 지금 유럽에 재연되고 있다. 시리아를 탈출하여 유럽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는 난민을 그 옛날의 훈족과 단순 비교 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여파를 본다면 유럽으로서는 “성경에서나 나올 법한 일(biblical proportions)”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영국의 외상이었던 Miliband가 라디어 인터뷰에서 실제로 이렇게 표현했다).

유럽이란 지형적 공간 안에 마련된 각종 제도적 편의와 인프라, 물적 인적 시스템은 사실상 유럽인만을 위해 가까스로 고안된 것이다. 이런 취약한 체제로 거의 대부분이 무슬림인 난민들을 유럽스러운 문화와 제도로 포용, 흡수할 수 있을까?

이미 여러 나라가 경고음을 높이고 있다. 기존 제도와 충돌하며 빚어질, 시간이 갈수록 커질 것이 뻔히 예측되는 사회적 혼란, 이들 틈에 끼어오는 IS 테러리스트. 당장의 인도주의적 개입과 별개로 유럽의 맹주 국가들로선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수십 만이 한꺼번에 밀려오는데 유럽 최강 독일이라고 묘책이 있을까? 발 빠른 북유럽의 핀란드는 이미 국경폐쇄까지 했으니 그들의 우려가 얼마나 심각한지 헤아릴 수 있다.

아직은 강 건너 남의 일로만 비칠 테지만 한국이라고 사정은 예외가 아니다. 이미 20년 전부터 증가하는 탈북자들조차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는 한국사회가 무슬림 난민을 수용할 수 있다고? 그건 허황된 거짓말이다.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탈북자들조차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에로 동화시키는데 많은 난관을 겪고 있는 현실이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다. 한국은 생사를 넘어온 이들조차 버거워하는 피로사회다.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지만 뼛속부터 중국인인 조선족은 또 어떤가. 이럴진대 시리아 난민이라니, 언감생심 거들떠 볼 여유조차 없는, 바쁘고 쫓기는 대한민국이다.

   
▲ 아프리카의 한 난민이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을 통해 영국으로 밀입국하려다 터널 안에서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지난 18일에도 시리아 출신으로 보이는 난민 한 명이 유로터널 인근에서 감전사하는 등 난민사태가 확산한 이후 10명 이상이 유로터널을 통과하려다 숨졌다./사진=YTN캡쳐
중동에 터잡아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유럽을 동경하여 건너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내란에 지쳐, 테러집단을 피해, 이미 황폐한 고향을 떠나 일단 살길 찾아 온, 말 그대로 정치적 난민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문이 드는 대목이 있다. 왜 유독 시리아 탈출 난민은 전부 유럽행을 선택하는 걸까? 같은 이슬람 문화권의 이웃국가로 가지 않는 이유가 있을까?

더 이상한 것은 사우디, 이란, UAE, 카타르, 오만, 터키 등 ‘무슬림은 형제’라고 부르짖는 형제국가들은 왜 침묵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시리아 난민 몇 십만 정도야 수용할 수 있는 땅도 있고 오일달러로 쌓아올린 재정도 충분하다.

들여다 보면 이슬람조차 실은 수니파와 시아파 둘로 나뉘어 서로 통합될 수 없는 갈등의 지경에 빠져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핑계가 될까? 그들이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지 못하는 유럽을 비난하는 것은 무슬림의 ‘가식’이라고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 문제를 ‘이슬람의 유럽 침략’이라고 개탄한 유럽 모 주교의 해석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정치종교적 평가를 받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유럽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특징 중 하나는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 산업혁명의 발원지, 브래드포드(Bradford)에 19세기 초 인도, 파키스탄으로부터 수많은 무슬림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다자녀 정책’과 ‘모국에 있는 부모, 형제 무조건 초청’ 결과, 지금 영국의 브래드포드는 영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문화 도시가 됐다.

말이 ‘다문화’이지 현실은 도시의 ‘무슬림 슬럼화’라고 불러도 무방할 지경이다. 유럽에 자리잡은 무슬림들은 절대 현지에 동화되지 않는다.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자기들만의 스타일을 고집한다.

‘동맹의 기원’(1987)을 쓴 신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중 한 명인 스테판 왈트 하버드대 교수는 오늘날 시리아 난민사태의 원인(遠因)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대(對)시리아정책이 경솔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화학무기를 봉쇄하는, 결코 작지 않은 성과를 냈지만 결과적으로 오늘날 시리아 사태의 발단이 됐다는 것이다. 만약 2011년 ‘중동의 봄’(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국과 나토, 아랍연맹이 즉각적으로 연합하여 지상군 투입을 준비하고 비행금지 구역을 시행하였더면 현재와 같은 정부군과 반군, ISIS와의 전쟁과 혼란은 예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신중하게 복기한다(Foreign Policy 2015년 9월 호).

시리아로 대표되는 현 중동사태의 근원에는 미국의 중동전략과 러시아, 중국과 잠재적인 군사외교적 갈등은 회피하려는 미국의 태도가 얽혀 실타래가 복잡해진 면이 있기는 하다.

터키의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짜리 아이의 시신은 전세계를 울렸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가슴 아픈 장면은 국경을 초월하고 인종과 종교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곧 현실상황으로 돌아오면 국경과 인종과 종교가 곧 모든 갈등과 차이의 어쩔 수 없는 정당한(?) 이유가 된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만이 인도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차라리 현재의 유럽행 난민사태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의 섭리와 뜻이 있는 게 아닐까 전망하는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이슬람 집단과 이웃해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늙어가는 유럽으로서는 뭔가 ‘각성(?)’할 마지막 기회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이다.

한낱 동네 마을회관이나 펍(pub)으로 전락한 고색창연한 유럽의 교회들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아직 알 길이 없다.

유럽 언론에서 난민의 유럽행을 경계하는 만평과 평론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독일인들이 시리아 난민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국내 보도에 반해, 현지 독일신문이 조사한 바로는 독일인 세 명 중 두 명이 난민유입 결사반대라고 전한다.

훈족의 유럽 서진이 진행될 당시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돼 있던 로마제국은 힘 빠진 거인에 불과했다. 훈족을 피해 로마제국의 영토로 밀고 들어간 고트족(동게르만 혈통)은 476년 서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만다.

훈족의 압박으로 유럽 전역에 흩어진 게르만족은 근 300년에 걸쳐 왕국단위로 발전하며 로마문화와 융합, 봉건제로 대표되는 중세를 열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가히 훈족에 의한 유럽의 재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은 유럽에 유입된 젊은 무슬림이 ‘유럽의 이슬람화’를 이룰지, ‘무슬림의 기독교화’가 진행될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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