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이 23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 종합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입을 모아 “우남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오늘에 기여한 건국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한 공은 전혀 무시된 채, 일부의 왜곡과 거짓 선동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자유경제원은 지난 5월 13일부터 9월 10일까지 7차에 걸쳐 이승만 관련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자유경제원이 23일 주최한 종합토론회는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에게 씌워진 7가지 누명에 대해 7인의 전문가가 나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진실을 밝히는 자리였다. 아래 글은 주제발표자로 나선 조우석 문화평론가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 조우석 문화평론가 |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의 원흉?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에 따르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영구집권과 종신 대통령을 꿈꿨던 독재자 중의 독재자이다. 그래서 중임(重任)제한 철폐 등으로 헌정을 어지럽혔으며,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라는 ‘악의 꽃’을 만들어냈다고 그들은 굳게 믿는다. 3.15에는 아예 ‘부정선거’란 꼬리표가 따라 붙는 게 상식이 됐고, 부정부패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걸 지휘했거나, 묵인했던 건국 대통령은 4.19로 인해 불명예스럽게 하야한 나쁜 지도자란 이미지가 지금껏 따라 다닌다. 과연 그럴까? 그건 당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멀뿐더러 건국 대통령을 악마화하려는 그동안의 지식사회 풍토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상식이지만 1공 당시 대통령 선거는 모두 네 차례 이뤄졌다. 첫 번째는 건국 직전인 1948년 7월 국회가 간선(間選)방식으로 뽑았다.
당시 제헌의원 198명 중 대통령에 이승만이 압도적인 180명의 표를, 이시영이 133표를 각각 얻었으니 절차에서 문제없었으며 부정선거 혐의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다. 두 번째인 1952년 8월의 제2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 처음으로 기존의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꿔 실시했다.
그것도 전시(戰時)상황에서 이뤄졌다. 어쨌거나 그건 2공화국 때 잠시 내각제로 돌아선 것을 빼고 3공화국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권력구조의 전통을 창출한 계기로 평가해야 옳다. 문제는 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인데, 결과로만 보면 이승만은 55.7% 지지를 얻어 당선된 게 사실이나 진보당 소속 조봉암은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23.8%를 얻었다.
▲ 우남 이승만은 4월 22일,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여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 이후 우남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야했다. |
놀랍게도 선거운동 기간 중 급서했던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무효표)가 20.5%나 쏟아져 나왔다. 우남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도와 함께 자유당의 1차 위기가 그때 찾아왔다. 그뿐 아니라 부통령 선거에서 낙관했던 이기붕이 떨어지고, 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는데 이게 내내 화근이었다.
당시 이미 여든 살이 넘었던 이승만의 유고시엔 권력이 야당으로 넘어갈 판이라서 자유당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1950년대 중후반 내내 찜찜해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집단적 불안심리 속에서 자유당은 4년 뒤의 3.15선거에서 적지 않은 무리수를 두게 된다.
이기붕의 자유당 강경파가 1차 책임...막지 못한 건 그의 잘못
사실 1956년 대선은 야당이“못 살겠다 갈아보자”란, 선거사상 가장 유명한 구호를 들고 나오고, 여당이 “갈아보니 별 수 없다”로 되받아친 대접전의 선거였다. 그 직전까지 사실상의 전시통치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이 좀 더 유연하게 움직였어야 했는데, 상황은 정반대로만 흘러갔다는 시대배경도 변수였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국가보안법 개정(1958년 말), 경향신문 폐간(1959년), 진보당 조봉암 사형(1959년) 등 1950년대 후반을 장식한 굵직한 현안들이 정부의 강공방식으로 처리됐는데, 이 또한 경직된 정국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진 3.15선거란 정확하게 말해 당과 내각 그리고 경무대 비서실의 합작이었다.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던 게 사실이고, 때문에 부정선거에 따른 후대의 각종 추궁으로부터 면죄 받아야 한다. 결정적인 대목이 그의 대선 당시 야당 후보 조병옥이 유세 도중 급서(急逝) 했고, 때문에 우남이 무리해서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구조에서 악명 높은 4할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전략 그리고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수법이 모두 동원됐던 것은 사실이며, 이는 총지휘지 이기붕의 작품이 맞다.
우여곡절 끝에 공식결과는 이승만 88.7%, 이기붕 79%였다. 숫자 자체가 조작 내지 조정된 것이었으며, 당시 연로했던 우남이 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 우남에게 부정선거의 원흉이란 누명을 모두 뒤집어씌우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이점은 4.19를 전후한 우남의 발언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발언으로 판단컨대 그는 민주주의의 교사로 손색없다. 정치지도자로서 그의 진면목은 고려대생이 촉발시킨 4,19 전후 새삼 드러난다.
일테면 4월 12일 부정선거 및 마산의 학생 시체 발견에 관한 보고에 분노해서 말한다. “부정선거를 왜 한 거야? 어린애를 죽여 놓고 뭐라고? 공산당 짓이라? 그걸로 해결될 것 같아? 대통령이 책임져야 해. 내가 그만 둬야 도리이니 후속대책을 빨리 마련하시오”라며 자진 하야를 암시했다. 당시 국무회의록을 보면 인(人)의 장막에 가려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으며, 진상을 파악한 4월 21일, 이기붕에게 사퇴를 요청했다.
그리고 4월 22일,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여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야했다. 국민이 하야하란다고 해서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물러나는 독재자를 본 적이 있는가?
▲ 민주주의는 오랜 경험과 과정을 거쳐 발전하고 성숙된다. 민주주의는 제도 도입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런 사례도 없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에 대한 관습이나 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대한민국에 민주주의체제를 만들어나갔다./사진=연합뉴스 |
우남의 이런 고귀한 뜻은 퇴임 후 각국 수반의 위로 편지에 대해 쓴 답장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 이야말로 그가 20대 시절에 썼던 『독립정신』에서 “무식하고 천하며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국민정신이 바뀌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라고도 말했던 것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새삼 돋보인다.
재확인하지만, 부정선거로 촉발된 학생시위로 하야한 우남의 결정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3.15 부정선거에서 드러난 수많은 과오에도 우리들은 그걸 밑천으로 민주주의 훈련을 거쳤다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다만 최고통치자인 우남이 이 모든 사안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순 없다. 그렇다면 이승만을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고 하는 누명은 너무 가혹하거나,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동서고금에 유례가 드문‘착한 권위주의 통치자’의 위대한 결단 덕에 대한민국은 지금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서있다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조우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