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석명 연예스포츠팀장] 요즘 비교적 잘 나가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요 트렌드가 하나 있다. '사적 제재'(또는 '사적 복수')다.
이달 초까지 인기리에 방영됐던 '지옥에서 온 판사'(SBS). 드라마의 설정 자체는 판타지다. 지옥에서 온 악마가 인간의 몸에 빙의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을 응징하고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악마가 몸을 빌린 인간은 판사(박신혜 분)다. 죄의 유무와 형량 등을 법리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해야 될 판사지만 이 '악마 판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명확한 범죄자를 적당히 봐줘 풀어준다. 그리고 스스로 사적 제재를 가해 피해자보다 더욱 끔찍한 고통을 맛보게 한 뒤 지옥으로 보내버린다.
법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는 '악마 판사'의 이런 행태는 오히려 시청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최고 시청률 13.6%(이하 닐슨코리아 기준)까지 찍었다. 근래 TV 미니시리즈 시청률이 10%를 넘기도 쉽지 않은데, 상당히 흥행이 잘된 편이다.
현재 방영 중인 '열혈사제2'(SBS)는 2019년 방송됐던 '열혈사제'의 시즌 2다. 범죄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국정원 요원 출신 열혈 신부님(김남길 분)이 주인공이다. 이 신부는 역시 열혈 정신에 똘끼를 갖춘 형사(김성균 분), 검사(이하늬 분)와 공조해가며 나쁜 놈들을 혼내고 또 혼내준다.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 '열혈사제2' 포스터.
2019년 첫 방송 때는 유머와 함께 진중함도 갖춘 묵직한 드라마였다면, 이번 '열혈사제2'는 코믹과 호들갑을 한층 강화해 훨씬 가벼운 느낌으로 분위기는 좀 바뀌었다. 다만, 그동안 신부님이 격투기를 더 연마했는지 액션은 훨씬 현란하고 더 강렬해졌다. 그만큼 악당들은 더 많이, 더 세게 신부님의 주먹과 발길질에 '사적인 제재'를 당한 다음 법의 심판을 받는다. 시청자들은 이런 점에 환호하며 첫 방송부터 11.9%의 높은 시청률로 호응을 해줬고, 10% 이상의 시청률을 유지 중이다.
지난 9월 개봉해 752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베테랑2'도 있다. 나쁜 놈은 끝까지 잡는 베테랑 형사(황정민)가 강력범죄수사대에 새로 합류시킨 막내 형사(정해인 분)와 함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범을 쫒는 수사 활극이다. 그런데 예쁜 누나가 밥 잘 사줄 것 같이 생긴 이 막내 형사가 사실은 죄를 지은 놈들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가혹하게 손을 봐주고 사형까지 집행하는 사적 응징자였다.
이전에도 '사적 제재'를 소재로 히트한 드라마는 많다. 시즌 1에 이어 시즌 2까지 모두 성공한 '모범택시'(SBS)가 대표적이다. 범죄의 피해자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 없는 억울한 사람들의 의뢰를 받은 명목상의 택시 운전사(이제훈 분)와 조력자들이 속 시원하게 사적 복수를 대행해줘 갈채를 받았다.
'더 글로리'(넷플릭스)는 사적 복수의 끝판왕이었다. 학교 폭력 피해자(송혜교 분)가 복수심을 가슴에 켜켜이 쌓아뒀다가 성인이 된 후 치밀한 계획 하에 가해자들을 하나하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현실이 반영된 학폭의 끔찍함을 먼저 사실적으로 보여줬기에, 시청자들은 피해자와 동화돼 함께 복수하는 심정으로 열광적 응원을 보냈다.
영화 '베테랑2',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 포스터.
이렇게 사적 제재(복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많은 관심을 받고 흥행에 성공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나쁜 사람들이 나쁜 짓을 못하게 만들고, 나쁜 일을 했으면 응당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법(法)이 해야 할 일이다.
법 체계가 제대로 작동해 억울하고 원통해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면, 사적 제재를 주요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별로 제작되지 않을 것이고, 흥행도 될 리 없다. '대리 만족'이라도 해야 하는 수요가 있기에 공급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에는 유튜브 등 개인 매체가 대세를 이루다 보니 일부 유튜버가 사적 제재를 자처하고 나서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죄와 벌의 한계가 모호해지고, 이성보다 감정적이 되기 쉽다.
매일같이 뉴스에서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법은 공정하게 집행돼야 한다'는 말이 들려온다. 그런데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알 만한 사람들이 오히려 법을 우습게 보거나 공정한 법 집행에 딴지를 거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드라마 속에서 나쁜 놈들이 제대로 혼나는 것을 보면 통쾌하기는 하지만, 평범하게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들을 지켜주는 현실 세계의 법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 보태자면, 아무리 극 중이라도 사적 제재나 복수를 다룬 드라마(영화)에서 액션의 수위가 너무 높다. 피 튀는 강력한 액션이 볼거리를 풍성하게 해주는 효과는 있겠지만, 어차피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다. 폭력을 보는 데 너무 익숙해지면 폭력 자체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 고려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디어펜=석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