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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
국정교과서 논쟁으로 한창 시끌벅적 한 가운데 오늘도 묵묵히 문화사 창조는 진행되고 있다. 역사 인식과 기록보다 응당 앞서 존재하는 창조 현장과 현물이 날선 국정교과서 공방에도 흔들리지 않고 듬직한 문화콘텐츠로 나와 주고 있으니 참 반갑다. 우리 전통문화재 함(函) 프로젝트를 해낸 어느 외국 회사 이야기다.
이 창조는 최고급 시계 명가 바쉐론 콘스탄틴이 도맡아 해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175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되어 260년간 단 한번도 그 역사가 끊긴 적 없이 이어져온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고급 시계 제조사다. 이 회사는 2015년 설립 2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국내 무형문화재 3인의 전통 공예를 후원했다. 이를 통해 1개의 ’함函’을 제작하는 로컬 프로젝트를 발족해 지난 9월 완성해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이 서양 명품 기업 안목이 고른 한국의 가치가 실제 작품 현물로 탄생하게 되었다. 어느새 잊히고 멀어져만 갔던 그 소목장, 옻칠 장인, 금속 두석장 무형문화재 명인들이 영화 <살아있는 박물관> 마냥 무너졌던 역사를 일어서게 해주었다.
의뢰인의 작품 디자인 콘셉트 자체부터 살아 있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아시아 고대 우주론에서 착안한 다음 저렴한 제품이라도 1,700만원 수준이라는 스위스 최고가 명품 시계를 담는 함 제작을 결정했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어보(御寶)를 담는 보록에서 형태적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어보’는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유물로 이를 담는 함을 ’보록’이라고 칭한다. 실제 영조 임금 때 사용했던 어보와 국새를 담는 함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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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쉐론 콘스탄틴 ‘함(函) 프로젝트’ 최종 완성작. |
조선 왕실의 함이 오늘날 스위스 명품 시계를 담는 함으로 재창조되는 이 프로젝트의 기획과 개발, 제작, 문화마케팅까지 전 과정은 정말 어디 교과서 국사책 못지않은 생생함으로 다가온다. 마침내 소목과 옻칠, 장석을 맡은 세 장인이 완성한 현대 문화재가 공개되었을 때 운집한 외교사절, 국내외 기업과 미디어 관계자들은 한국사가 뿜는 아우라에 흥분하고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700년 묵은 우리 느티나무를 골라 7년 말려 사용한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 기능보유자 박명배 명인이 불태운 작품 혼은 그냥 속절없이 눈을 씻게 만든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1호 칠장 손대현 명인과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기능보유자 박문열 명인이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한 외장 마감은 예술은 무한하다는 말을 꿀꺽 삼키게 만든다.
이렇게 우리 뿌리였던 고목과 놋쇠, 옻칠로 어렵사리 완성된 바쉐론 콘스탄틴 명품 시계 함을 마주하면서 과연 역사는 어디에 있고 국사책은 어떻게 씌어져야 하는가를 생각해본다. 어느 스위스 회사 하나가 자그마한 물건 함 하나이지만 그 가치와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그저 조선시대 문화재 박제로만 겉돌 지 않았을까?
정치인들과 학자, 비평가 논객들이 합세하여 우리 정신문화, 정통성과 이념적 정체성과 같은 민감한 콘텐츠들을 정리한답시고 사관 논쟁을 벌일 적에 나전칠기 현대화 같은 진짜 문화융성 창조경제 아이템들은 죄다 묻혀버리고 녹아내리지 않을까?
역사와 문화, 예술 현장의 진정한 일꾼들은 노상 밀려나고 마는 이런 지긋지긋한 악습을 끊어버릴 순 없을까?
그러니 과거 역사 기록에 매몰되어가는 한심한 이 시점에 단 한 점이라도 손수 만들고 널리 알리고자 헌신한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기업의 문화마케팅 노력이 더욱 소중하고 고맙다.
우리 기업들마저 외면했던 문화재 재창조와 현대화, 산업화, 글로벌화가 연출된 현장이 곧 우리가 읽어야 할 역사책임을 통렬히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막 달구어지고 있는 국정교과서 찬반 대회전에 들어온 정치인과 각계 학자와 단체, 논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한 가지 내밀어 본다.
“가령 전통문화이기도 한 한의학의 경우 한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도 않고 정책 예산은 220억원(2014년)으로 중국 중의학 정책 예산 1조677억원과 비교조차 할 수 없고 감염병 창궐 시 한의학 참여를 배제한다고 하는데 ... 위정자라는 이름들아, 역사책 타령 말고 실사구시 진짜 배기 현실 문화사는 도대체 언제 만들거냐”라고.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