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홈 경제 정치 연예 스포츠

박경귀단장 고전특강(87)-한민족 문화유산의 보고 '삼국유사'

2015-10-24 08:44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87)- 단군신화와 풍성한 설화가 담긴 영감의 원천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정사보다 야사가 더 재미있는 법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단순한 야사를 훌쩍 뛰어넘는다. <삼국유사>에는 정사로 전하기 어려운 주옥같은 신화와 설화, 향가가 가득하고, 기이한 유사가 넘친다. 한국인이라면 <삼국유사>의 한 두 대목쯤 읽거나 들어보지 않을 사람이 없을 듯하다.

교과서는 물론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삼국유사>의 모티브가 차용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138개 조목의 이야기들은 고대 및 중세 우리 민족의 꿈과 정서, 종교와 풍습, 고대 국가의 건국과 제도를 담고 있는 영감의 원천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로 치부되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고려시대의 승려였던 일연은 13세기 후반에 이 책을 썼다. 그는 부처님 제자답게 이 책을 통해 영원한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의 이상과 열망을 채록했다. 그는 당시 고려의 국교로 숭상되던 불교를 더욱 진흥하고자 한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의 바탕은 불교적 가르침이다. 사찰, 불상, 탑파, 종 등 불교에 관련된 이야기가 상당부분 차지하는 이유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매우 넓다. 모든 내용을 불교적 관점에서 쓴 기담집은 아니란 뜻이다. <삼국유사>에는 건국의 신화들, 건국 시조와 뛰어난 활약을 보인 인물들, 그리고 신라 역대 왕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가 담겼다. 또한 불법을 크게 일으킨 고승과 선인들의 도력과 신통력, 신심(信心)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숱하다. 또 당대의 유명한 사찰 창건의 비사, 세상을 피해 산 도인과 선사들의 기담(奇談)은 물론, 효도와 착한 행실로 주변을 감동시킨 이야기와 평범한 백성들의 희로애락 등 다채로운 콘텐츠가 담겨있다.

이러한 다양한 소재들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신화나 미신적 요소와 많이 결부되어 있기도 하지만, 당시의 우리 땅과 자연환경, 문물과 사회 습속 등 사실적 요소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를 읽어내는 코드는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언어학자는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말의 뿌리와 그 변화를 추적해 볼 수 있고, 문학가는 수많은 설화와 향가를 통해 민족 문학의 원초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불교연구가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 그리고 밀교를 비롯한 초기 불교 계파의 갈래와 고승들의 승맥(僧脈)과 지향을 탐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역사학자는 단군 이래 건국된 한민족 여러 국가의 기원과 건국의 아버지들을 살펴보는 것은 물론, 신라 역대왕의 치적과 왕력(王曆)을 정리하는데 <삼국유사>는 더 없이 긴요할 것이다. 어떤 이는 <삼국유사>에서 천문지리의 신비한 현상들을 해석하고 궁구해 보려했던 선조들의 과학정신을 읽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삼국유사>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소재가 다양하고 방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이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역사의 상고사와 신화, 설화를 풍성하게 담고 있어 문헌학적 가치 또한 뛰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5천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실상 기원전 3천여 년 간의 우리 민족의 활동상을 증명해줄 유물과 유적, 문헌은 거의 전무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참조했다고 언급한 <고기(古記)>들 즉, <단군고기>,<해동고기>,<삼한고기>,<본국고기>, <신라고기>조차 모두 유실되고 전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삼국유사>가 외로이 우리 상고사의 신화와 건국사를 감당하고 있다는 점은 천만다행이면서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집트는 차치하고, 그리스만 하더라도 기원전 3천년의 역사를 현존하는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증거하고 있다. 기원전 1천여 년 이전부터 <일리아스>와 같은 대서사시들이 구전되고 호메로스라는 걸출한 시인에 의해 인류의 고전으로 전승되지 않았던가.

<삼국유사>에서 주목할 대목들은 너무나 많다. 독자들의 취향에 따라 관심 있는 분야의 글을 선택하여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단연 단군신화다. 일연은 <위서>와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전한다. 한민족의 뿌리는 환웅의 아들인 단군에 있으니, 우리는 곧 천신족(天神族)이다. <삼국유사>는 이를 기록하고 전승해줌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켜 준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자신들을 천제(天帝)의 자손으로 설정하는 것은 공통적인 현상이다.

고대 국가의 시조들이 자연신과의 교접을 통하거나 알에서 태어나는 등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탄생한 것으로 전하는 것도 과학적 잣대만으로 볼 일은 아니다.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무언가 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건 위대한 건국 시조들을 갖고 싶은 당대인들의 꿈을 신화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화와 설화들은 바로 당대 민초들의 꿈이었고, 꿈은 바로 신화와 설화가 되었다. 여기에는 자연 속에 부처와 보살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경건한 자연관도 배어있다. 신과 인간, 자연이 서로 교합하고 상통하며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는 게 바로 꿈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평범한 백성들의 사랑이야기도 흥미롭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애틋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조신의 꿈속의 사랑처럼 사랑의 집착과 덧없음을 노래한 이야기도 있다. 반사와 첩사, 관기와 도성처럼 신심이 두터운 도반의 이야기가 있는 반면, 두 원화 사이의 시기심이 살인을 부른 악행도 소개된다. 남모랑을 시기하여 죽인 교정랑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신라의 원화제도를 폐지하게 만든 사건이다. <삼국유사>에는 원화제도를 고쳐 만든 화랑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널리 알려진 고승들의 신령스런 이야기, 원효와 혜공이 도력을 다툰 똥과 물고기 이야기, 중생을 일깨우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환생하는 선사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오랜 옛날부터 구전되어온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요 이야기의 말미에 자신의 소회를 시로 담아 마무리했다. 짧은 한 연의 시에 이야기의 핵심적 내용과 감동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문화의 원형을 보여줄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나 민족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문화 교류의 흔적도 많이 남기고 있다. 김수로왕의 아내가 된 인도인으로 추정되는 허황후의 도래나,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처용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문화에 유입된 외래문화의 뿌리가 꽤 멀리까지 뻗어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경문왕의 설화와 유사한 설화는 여러 나라에 퍼져 있다. 특히 원전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10세기 경 소아시아 지역의 프리지아 왕국 미다스 왕의 설화와 흡사하다는 점도 주목을 끈다.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민속, 신화와 설화, 문화유산을 담고 있는 보배다. 특히 민중들에게 오랫동안 애독되면서 불교 뿐 아니라 유교, 도교적 관점에서의 교화적 기능도 적지 않게 수행했을 것 같다. 영험하고 감동적인 많은 이야기를 통해 권선징악적 교훈을 암시하거나 유교적 효행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우리 또한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삼국유사적 사유와 행동’에 적지 않게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삼국유사의 이야기와 얽힌 유물과 유적, 향토 설화와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삼국유사>가 무한한 상상력과 영감의 원천이 되고, 아직도 우리가 삼국유사적 모티브에 쉽게 감동 받을 수 있는 것도 이런 문화유산의 토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행정학 박사·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삼국유사』, 일연 지음, 이가원․허경진 옮김, 한길사(2012), 616쪽.

종합 인기기사
© 미디어펜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