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옥 후 대한독립 외교활동 수행…1919년부터 민주공화국 고심
해방 후 미 군정 '반탁운동' 주도…유엔 감시하 총선거 실시 '지원'
대통령 취임 전후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유엔 승인 받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 지난 11일 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민성금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모금운동은 기업, 시민사회, 일반 국민 다수가 함께 참여하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일본제국주의 당시 국제외교 및 계몽 활동을 통해 자유독립을 실현하고자 애썼다. 또한 1945년 해방 후 3년간 미 군정 당시 유엔 감시하에 국민총선거를 실시하도록 막후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결국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독립운동 당시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의 원인됐다거나 6.25 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논란, 3.15 부정 선거의 책임을 지고 4.19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등 현대사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과 과가 치열하게 연구되고 재평가되는 과정 속에서 초대 대통령이라는 분명한 지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기념관조차 없는 것에 대해 현대사의 빈공간이라는 우려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이에 미디어펜은 현 시점에서 이승만기념관이 왜 제기되는 지를 보다 객관적으로 알기 위해 총 3편의 연재 시리즈를 기획해 보도한다. [편집자주]

[우남의 꿈①] 이승만, '조선 반역죄' 사형수에서 대한민국 건국대통령까지

   
▲ 2012년 제헌절인 7월 17일 서울 중구 장충동 자유총연맹 광장에서 대형 태극기가 우남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동상 너머로 펄럭이고 있다. 자유총연맹은 이날 오전 35m 높이의 게양대에 가로 6m, 세로 4m 크기의 대형 태극기를 걸고 제64주년 제헌절 기념행사를 열었다. /사진=연합뉴스

[미디어펜=김규태 기자]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晚, 1875~1965)은 19세기 후반 조선왕조에 태어났지만, 당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보였다.

우남은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이다. 우남은 신분상 왕족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13대조인 이윤인에서 끝났다. 이후 벼슬길이 끊기고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았다. 우남에겐 두 명의 형들이 있었지만 우남이 태어나기 전 홍역에 걸려 모두 죽었다. 우남은 형들 사후, 6대 독자로 자라며 집안에서 장남 역할을 대신했다.

우남은 "아버지(이경선)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며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가난하게 자랐던 우남은 조선왕조에 비판적이었고 왕족인 자신의 가계를 밝히기 꺼려 했다.

당시 우남 부모의 희망은 아들이 과거에 합격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과거제도는 너무나 부패했기 때문에 우남은 실력이 있어도 합격 가능성이 없었다. 그것도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되면서 19세의 이승만은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다.

우남의 인생 역정이 첫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20세인 1895년 4월 2일 헨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했던 순간이다. 우남은 이 때 한반도 밖의 세계를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우남은 1년 뒤인 1896년 5월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고 서재필은 우남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하기도 했다.

우남은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서양문명의 핵심인 '정치적 자유'를 배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자유주의와 국민은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민주주의 사상을 결합한 자유민주주의는 우남에게 큰 충격이었다. 조선인이었던 우남은 왕조국가의 모순을 겪고서도 조선의 내부 밖에 몰랐다. 밖의 훨씬 더 큰 세계에 어떤 사상이 있는지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우남은 배재학당에서 모든 인간에게 자유와 평등, 국민에게 정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선교사들의 설명을 듣고 넋을 잃는다. 조선왕정 치하에서 이런 사상은 없었다.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우남은 자신의 상투를 잘랐다. 조선이라는 인습과 결별한다는 결의였다.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해 5년 넘게 옥살이 했던 사형수

우남에게 있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던 사건은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된 것이었다. 우남은 원래 사형을 받았다가 종신형으로 바뀐다. 그 와중에 매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우남에게 남은건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우남은 절망에 지지 않았다. 절망 속에 있던 우남은 어느 날 불현 듯 간절히 기도하는 체험을 갖게 되고, 그날 회심하여 하나님을 주인 삼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으로 바뀌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우남은 이후 감옥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다. 우남은 당시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 한영사전 등을 정리하기도 했다. 즐겨 읽은 것은 윌리엄 스윈튼의 ‘세계사 개요’, 로버트 매켄지의 ‘19세기 역사’였다. 우남은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냈다. 선교사들이 보내준 책으로 감방 도서관도 열었다. 자유가 거세된 환경이었지만 우남은 그 안에서 개인의 자유, 나라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정립했다.

   
▲ 이승만 초대대통령. /사진=미디어펜DB

이윽고 우남은 1904년 6월 29일 국민계몽서인『독립정신』 원고를 완성했다. 갑작스레 석방되기 6주 전이었다. 우남의『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다. 서양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하자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정확히는 미국을 모델로 한 문명개화를 통해 이를 이루자는 것이다.

우남은 옥중이라 자료를 구할 수 없어 과거에 자신이 썼던 글들을 토대로 본인의 생각을 새로이 정리했다. 우남의『독립정신』은 지금 2023년에 대입해 봐도 손색이 없다. 곳곳에서 세계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이 담겨 있다.

『독립정신』에서 우남은 조선의 새로운 동맹국이 될 강대국은 미국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남이 옥중에 있던 1900년대 초반은 대영제국이 패권국가로 군림하던 시대다. 그런데 우남은 미 합중국에 대해 당시 전세계를 호령하던 강대국 중 유일하게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이 없는 나라로 보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남은 시장경제 질서에 대한 깊은 이해 등 경제적 통찰력도 드러낸다. 『독립정신』에서 우남은 경제적 풍요가 인간에 대한 존중을 만들어내고 상업과 무역이 나라간 살림을 증진시키며 공업화 및 기계화는 사람의 일감을 덜어주고 그 결과 교육이 확대되는 원리를 설명하고 나섰다. 우남은 이 지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도 언급한다. “순리가 통하고 약한 사람이라도 두려울 것 없다”는 명분을 들며 말이다.

우남은 『독립정신』에서 '자유'라는 근대적 가치와 관련해 “국민의 마음이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하게 주창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국민이 깨어서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사상 등)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가 아니라 “자유로워야 한다”고 설파한 것이다. 우남은 『독립정신』에서 ‘자유’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조선 백성의 머릿속을 채우고 가치관을 재무장하자는 근대적 제안을 내놓는다. 조선왕조와 같은 전근대적 국가에서 진정한 의미의 근대국가로 거듭나자는 혁명적 제안이다.

외로운 외교 투쟁 벌인 독립운동가

미국으로 건너간 우남은 학부-석사-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석학과 동등한 차원으로 지적 성장을 이룬다. 또한 미국 활동을 통해 여러 인사들을 만나면서 세계정세를 목격할 수 있었다. 우남은 2차세계대전 속에서 급변하는 국제정세가 한반도의 독립을 유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외교 운동을 펼쳤다. 한반도의 독립이 가까워 지기 전, 일본의 만행을 예측하고 폭로했을 정도다.

우남은 당시 조선이 사라진 상태에서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은 '외교'라고 생각했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에게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강대국이 한반도 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우남은 국제정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에 우남은 여러차례 숱한 실패를 맛보았다.

1921년 10월부터 1922년 1월까지 열린 워싱턴 군축회의에 우남은 임시정부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회의장에 나타나 독립청원서를 제출했지만, 회의에 참석조차 못했다. 임시정부가 국제 승인을 받은 기구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1933년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총회가 열렸을 때, 우남은 임시정부 대표로 대한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제네바를 방문하게 된다. 제네바에서 우남은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회의 의제 채택을 호소하고, 국제연맹 사무총장에게는 독립청원서까지 보냈으나 일본의 방해로 끝내 의제에 올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남에게 응답한 것은 1941년 미국의 교포사회다. 하와이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했고, 우남을 위원장에 선출했다. 상해 임시정부도 당시 이 결의를 존중했고, 우남을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우남이 미국 정계에 '대한독립'의 필요성을 각인시킬 수 있는 계기였다.

같은 해 6월 우남은 ‘Japan Inside Out’라는 저서를 출간한다. 우남은 책에서 일본의 야욕을 지적하며 일본이 조만간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책 출간 6개월 후 일본은 미국 하와이 해군기지를 공격했다. 식민지가 아닌 미 본토가 침공당한 첫 사례였다. 바로 진주만 공격이다. 우남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저서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우남은 더 유명해졌다. 기세를 몰아 우남은 당시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에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요구했지만 또 거절당했다. 

1942년 3월 우남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호소문을 보냈지만 불발에 그쳤다.

일본과 미국 간 태평양전쟁 말기, 우남은 미 육군 전략정보처가 한국인 청년들에게 특수훈련을 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는 계획을 성사시켰다. 이 계획에 따라 1945년 초 2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이 특수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의 원폭과 그에 따른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중국 서안에서 훈련 중이던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마찬가지로 국내에 진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우남은 1945년 6월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단파방송을 통해 한반도 동포들에게 ‘독립에 대해 희망을 갖으라’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일본이 패망하는 순간까지 외교적 노력을 다한 우남이었다.

   
▲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호암미술관 앞뜰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맥아더와 이승만 동상,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동판을 세웠다. (사진 위) 호암미술관에 있었던 동상과 동판, (사진 아래) 이후 CJ제일제당 인천제1공장 입구로 옮겨진 동상과 동판. /사진=호암자전 제공, 미디어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우남의 최대 업적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명실공히 주역 중의 주역이었다. 혼자 외로이 외교로 한반도의 독립 투쟁을 벌이던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우남의 건국 업적을 밝히려면, 건국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1945년 10월부터 1948년 8월까지 한국은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다. 1946년 8월 15일은 제1회 해방기념일이었다. 1947년 8월 15일에는 역시 해방2주년을 기념하는 대회가 열렸고, 당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한국의 ‘자유독립’을 보장한다고 말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순간이었다. 앞서 국민총선거를 통해 제헌의회가 결성됐고, 제헌의원들이 모여 대한민국 헌법을 작성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한 후, 한달간 준비를 거친 끝에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건국의 순간이다. 초대 건국대통령은 국회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196명 중 180명이라는 압도적인 표를 얻은, 우남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자정을 기해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북위 38도 이남 지역의 통치권을 인수하였다. 넉 달 뒤인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48대 6의 압도적 다수로 대한민국을 승인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국제 공인을 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유엔총회는 유엔이 선거를 감시할 수 있었으며 한국인의 압도적 다수가 살고 있는 한국(한반도)의 그 부분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권과 관할권을 갖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합법적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결의했다. 또한 한국(한반도)에서 그러한 합법적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유일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유엔 결의에 따라 1950년까지 자유진영 26개 국가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고 양국 간 국교를 수립했다. 이러한 외교적 배경을 토대로 같은해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즉각적으로 자유진영 국가들이 UN 연합군을 결성해 한반도로 파병할 수 있었다.

현 2023년을 살아가는 국민들은 잘 모르지만, 원래 대한민국 4대 국경일은 3·1절, 헌법공포기념일(제헌절), 독립기념일(건국절), 개천절이다. 이는 정부가 1949년 6월 국회에 회부한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9년 8월 15일 정부는 제1회 독립기념일을 성대하게 경축하였다.

제1회 독립기념일을 경축한 지 한 달 뒤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바뀌었다. 이듬해 정부는 1950년 8월 15일을 제2회 광복절로 경축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발발 두 달이 지나 임시수도 대구에서 개최된 8.15 기념식에서 “제2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의 기념사를 행하였다. 마찬가지로 1951년은 제3회 광복절이었다.

1958년의 광복절은 특별히 건국10주년의 기념을 위한 각종 행사로 떠들썩하게 경축되었고, 박정희 정권 시절의 1968년 광복절은 건국20주년이었다. 당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국20주년을 축하한다는 축전을 보냈다. 국내 신문들도 건국20주년을 맞아 건국사를 회고하는 특집을 연일 게재하였다. 

문제는 1987년 10월 제9차 헌법개정에서 일어났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관련된 해당 부분이 바뀐 것이다. 이전까지 헌법전문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이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임시정부 출신 모 인사가 벌인 개인적 로비에 따른 것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사는 이 순간부터 심각하게 왜곡되기 시작했다. 사실과 다른 역사가 버젓이 만들어졌다. 북한 시각에서 바라본 민족주의 사관의 침투가 이 때부터 이루어졌다.

사실 대한민국 건국의 결정적 순간은 1943년 카이로선언이다. 그 주역 또한 우남이었다. 당시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것은 우남을 비롯한 미주 독립운동의 값진 성과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성립은 미주에서의 독립운동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는 당연하고 명백한 사실이다. 1948년 5월 자유총선거 이후 6~7월 제헌의회에 포진한 임시정부 출신 인사 20여 명 중 신생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을 잇는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 전후의 배경을 살펴보면, 자유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우남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942년 11월 미 국무부가 우남에게 ‘임시정부 목표가 무엇인지 문서로 알려달라’고 하자, 우남은 “1940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 처칠 수상이 발표한 ‘대서양 헌장’에 제시된 자유주의 이념을 실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특히 우남은 “자유선거를 통해 세워진 한국인들의 자유주의 국가는 극동에서 침략국을 견제할 완충국이 되어 평화 유지에 기여할 것”이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승인되지 않는다면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고서 한반도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는 불행한 결과가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3년 2월 23일 우남의 이러한 생각을 받아 한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대해 언급하게 된다. 우남의 외교적 노력이 강대국 리더의 관심을 끈 것이다.

실제로 1943년 11월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이 한국인들의 노예 상태를 유념하여 ‘적당한 시기와 절차에 따라’ (한반도의)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고 발표하게 된다. 우남은 몇십년 간의 실패와 좌절 끝에 눈으로 보이는 외교 성과를 처음으로 거둔 것이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선언적 서술에 불과하다. 1919년 당시 국가의 3요소인 주권과 국민, 영토 중 최소 주권과 영토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신들이 건국했다고 명시한 적이 없다. 

임시정부가 남긴 각종 문헌자료에서 김구를 포함한 모든 임시정부 요인들은 ‘우리는 앞으로 건국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1945년에는 일제의 패망으로 인한 해방이 일어났고, 3년간의 미군정 기간을 지나 1948년에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우남이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고수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독립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우남의 공이다.

   
▲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2023.3.26 /사진=연합뉴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시작

우남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탈조선의 첫 단추를 미국을 모델로 이루었다. 바로 1인 1표 민주주의의 전면 도입을 비롯해, 정치적 자유 등 모든 영역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구축이다.

우남은 이 과정에서 세계 초강대국으로 거듭난 미국의 국력을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용하려 했고 미국이라는 제국의 장점들(대통령제, 삼권분립, 형사사법 등 법치, 자유시장경제)을 신생 대한민국에 도입하려 애썼다. 우남의 판단으로 ‘미국’은 한반도의 독립에 가장 중요한 고려 항목이자 변수였다.

제헌의회 구성은 나라의 근간인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필수적인 절차였다. 이 제헌의회가 내놓은 대한민국 헌법이 우남의 사상을 담은 대표적 사례다.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인 1948년 5월 10일, 한반도 남측에서 제1대 제헌의회 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인구 15만 미만은 1개 구, 인구 15만 이상 25만 미만은 2개 구, 인구 25만 이상 35만 미만은 3개 구, 인구 35만 이상 45만 미만은 4개 구로 하여 총 200개 선거구를 확정했고 이 총선에 948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4.7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이 총선거에서 문제가 일어난 제주도의 2개 구를 제외하고,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총선거가 실시된지 3주 후인 5월 31일 헌정사상 최초로 제헌의회가 열린다. 국회의장에 우남 이승만 박사를, 부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한다. 이 제헌의회가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당초 제헌의회 발족 후 내부적으로 헌법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우남을 향해 ‘대만 장개석과 같이 총통제를 하자’, ‘기독교를 국교로 삼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우남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완전히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실현’ 외에는 우남의 머리 속에 없었다.

이윽고 7월 17일 완성된 제헌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고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우남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삼고,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첫 발을 내딛는다.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 및 건국의 순간이다.

2023년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1948년 있었던 이 사건들은 최근 경험한 여러 차례의 선거 중 하나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체, 주권을 확립한 국민 총선거-제헌의회-헌법-정부 수립-건국 선포의 과정 하나하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기초를 닦고 기둥을 세우는 의미였다.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남은 숙고하고 치열하게 경주한 끝에 그 꿈을 이룬다. 바로 국민이 주인인 나라다.

제헌의회를 통해 만들어진 헌법 제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나온다. 헌법 제2조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한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써 국민주권시대를 연다. 이 선언을 통해 우남은 앞서 500년 넘게 존속되어온 조선왕정체제를 깨고 왕이나 사대부가 아닌, 국민을 주권자로 삼는다. 한반도 근대적 정치체제의 시작점이다. 조선왕정을 회복하거나 구체제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우남은 아시아에서 손꼽힐만한 정치 혁명 그 자체를 이끌었다.

원래 당시 한반도 사회의 지배적인 여론은 우남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미 군정청 여론국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어느 사상을 찬성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71%가 사회주의라고 답했다. 자본주의는 14%, 공산주의는 7%, 잘 모름 답변 비중은 8%였다. 자본주의를 찬성한다는 응답은 14%에 불과했지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더한 응답자 비중은 78%에 달했다.

당시 여론은 이랬지만, 제헌의회는 경제적으로 사유재산권 보장과 시장의 자유경쟁, 시장경제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를 분명히 했다. 여론을 뒤집은 우남의 위대한 선택이었다.

건국의 순간으로 돌아와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이 새로운 국가는 개인의 근본적인 자유를 보호하는 민주정체다”라고 선언한다. 이는 집단주의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위대한 발견을 통해 자유라는 가치를 가장 중요시하겠다는 선언이다.

근대 시민은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공화국이라는 국가 형태를 채택했다. 그래서 공화국은 민주주의 원리를 수용해 개인의 신체 자유와 행복의 추구, 사유재산권을 보호한다. 이것이 다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은 우남의 리더십을 통해 이러한 근대적 가치를 품고 민주공화국으로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