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위기의 영국이다. 지금 영국 국민들은 테러와 대형 참사보다도 더 강력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외부적인 위협이나 재난을 압도하는 내부적이면서도 정체가 없는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내재적 공포가 죽은 자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공포 속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있다'고 탄식하고 있다.
지난 14일 새벽 런던 그렌펠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에 대해 영국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죽음의 힘이 영국을 휘감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단지 테러나 재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사람들은 영국이 어떤 알 수 없는 재앙에 휩싸여 있다고 생각하며 우울해하고 있다. 사람들은 잇따른 테러가 영국에 집중되는 것도,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을 대형 화재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은 것도 알 수 없는 재앙에 의해 영국을 덮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은 올해 들어서만 이미 3번의 테러를 겪었다. 지난 3월 22일 웨스터민스터 브리지 차량 돌진 테러로 4명이 목숨을 잃고 50명 이상이 크고 작게 다쳤다. 이미 지난 해 프랑스 니스와 독일 베를린에서 이와 비슷한 유형의 트럭을 이용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 행위가 벌어졌던 터라, 영국은 긴장을 하면서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평온을 되찾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히 두 달 후인 5월 22일, 이번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성지로까지 일컬어지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또 다른 테러가 발생했다. 이날 맨체스터 아레나에서 미국의 팝 가수 아리아나 그란데의 공연이 있었고, 바로 그 공연이 끝날 무렵 아레나 밖에서 자살 폭탄에 의한 테러로 22명이 사망하고 6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지난 14일 일어난 런던 그렌펠 아파트 화재는 영국인들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공포를 주고 있다. 사진은 영국 데일리 메일 보도 화면.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2주가 채 되기도 전인 6월 3일 다시 런던을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런던 브리지와 런던 시민과 관광객들이 한데 뒤섞여 붐비는 버러 마켓 인근에서 차량 돌진 테러가 발생해 6명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쯤 되니 영국 사람들은, 특히 런던 시민들은 연속된 테러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눈에 영국 정부는 테러에 대해 전혀 예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 어떤 테러가 또 다시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공포가 극대화되지 않으면 이상할 노릇이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아직까지 런던 화재에 대한 원인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다.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라는 점에서 테러로 연결 짓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최근 분위기 탓에 테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16일 현재 3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올지 모른다는 보도는 런던 시민들을 힘들게 한다.
이런 가운데 런던을 중심으로 한 영국 사회는 테러나 참사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한 민심의 흉흉함이 더 극성이다. 잇따른 테러와 뒤따른 대형 화재에 대해 음모론이 활개를 치는 가운데, 브렉시트를 등에 업고 집권한 테레사 메이 총리의 보수당 몰락도 그런 소문에 한데 엮이고 있다. 즉 영국이 저주에 휩싸였는데, 그 저주의 근원이 테레사 메이와 브렉시트라는 것.
런던 시민들 중 "영국 보수당 정부가 테러를 일부러 방관한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3월 22일 테러 현장인 웨스터민스터 다리에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던 제임스 브로서라는 은행원은 "잇따른 테러가 보수당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신뢰는 물론, 브렉시트의 필요성을 각인시킬 것이라고 정부는 생각하는 것 같다"고 얘기한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대학생 비키 맥도넬도 "몇 번 정도의 테러가 나면 영국 사람들이 보수당에 의지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테러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않는다"고 정부의 대테러 대책의 무성의를 비난했다.
런던 센트럴 모스크에서 그렌펠 아파트 화재 희생자를 추모하는 예배를 마치고 나온 리비아 출신 무함마드 바크 씨는 "주변에서 무슬림을 보는 시선이 더 냉혹하다. 아파트에 화재가 나니 그 아파트에 살던 무슬림이 저지른 범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 그런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주장으로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과반 의석 획득에 실패하고 잇따른 참사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테레사 메이 총리의 실각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관측이 많다. 사진은 영국 가디언 보도 화면.
이런 식의 음모론이 아니더라도 브렉시트 때문에 영국이 테러 집단의 타킷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런던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석사 과정의 마이클 램버트 씨는 "무슬림을 적대시하고 난민을 거부하기 위해 브렉시트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비단 브렉시트에 반대하던 영국의 젊은이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현재 영국 내에서 이미 영국인으로 살고 있는 무슬림 중에서는 브렉시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젊은이들도 많다"고 얘기한다. 그는 "IS나 그 추종 세력이 아니더라도 브렉시트를 막기 위해 봉기하자는 모임들이 대학에도 있다는 얘기들이 많이 들린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게다가 영국인의 해외 이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보도도 민심의 향배를 가늠케 한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이 브렉시트를 결정한 후 독일로의 이민이 전년 동기 360%가 늘었다고 한다. 스웨덴과 덴마크 시민권 신청은 전년보다 10배가 늘었고,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등 다른 EU 국가 시민권 신청도 급격하게 늘고 있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마무리 하더라도 EU 시민권을 유지하기 위해 말하자면 조국을 버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탈영국' 움직임이 잇따른 테러나 런던 화제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악재가 끊이지 않으니 영국의 민심이 메이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실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테레사 메이의 보수당은 DUP와 연정을 단행함으로써 메이가 강조해온 '하드 브렉시트'에서 DUP의 주장인 '소프트 브렉시트'로 입장이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다.
런던 화재 현장에 24시간 만에 나타나 주민들은 만나지도 않고 소방 관계자만 만나고 황급히 현장을 떠난 메이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원성은, 잇따른 재앙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공포심이 더해져서 '암울한 영국'이라는 심각한 인식의 대혼란을 불러올 것으로 유럽 각국에서는 바라보고 있다. /이석원 언론인
[이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