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황정민은 '공작'을 단순한 첩보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영화가 한국 첩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해낸 스파이의 일대기로 그쳤다면 그의 마음도 동하지 않았을 테다.
"개인으로 보면 남북의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고, 조금 더 크게 보면 화합에 대한 이야기고, 그걸 확장하면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겠죠. 그건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전 '공작'이 남자들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사상과 신념이 모두 다른 두 나라의 남자가 하나의 신념으로 뭉치면 좋은 우정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공작'의 배우 황정민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공작'은 1990년대 중반,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의 실체를 파헤치던 안기부 스파이가 남북 고위층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감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첩보극이다. 황정민은 육군 정보사 소령으로 복무 중, 안기부에 스카우트돼 북핵 실상 파악을 위해 북의 고위층으로 잠입하라는 지령을 받는 박석영으로 분한다.
대북 사업가로 위장해 북의 고위 인사 리명운(이성민)에게 접근한 그는 공작전을 수행하며 북핵의 실체에 한 발 다가가지만, 1997년 대선 직전 남한 측 수뇌부가 북의 고위급과 접촉하려는 낌새를 느끼고 혼란을 느낀다. 온통 민감한 내용들로 가득한 '공작', 촬영 당시만 해도 "이게 가능해?"라는 말이 수십 차례 나왔다고 한다.
"촬영 당시 남북관계가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어요.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이게 가능해?', '김정일을 이렇게 대놓고 찍어도 돼?' 이런 얘기를 많이 했죠. 물론 찍어도 되는 건데 저희는 괜히 책잡히면 어떡하나 싶으니까. 나중에는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해', '열심히 하자' 이런 분위기로 바뀌었는데, 남북 평화 협정이 합의되면서 완전히 상황이 바뀌어버렸어요. 너무 놀랐어요. 남북 정상이 만나는 장면이 저희 앵글과 너무 비슷한 거예요. 저희끼리는 서로 문자를 날리면서 '헐', '대박', '우리 장면을 베낀 거 아니냐' 이런 소리도 했어요."
'공작'이 그리는 풍광이 사회적, 국제적으로 예민한 사안임을 알았다. 하지만 윤종빈 감독에 대한 믿음과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촬영이 진행되지 않을 때도 자신감이 있었다는 황정민이다.
"모티브로 한 실화를 접하고 너무 놀랐어요. 저도 90년대를 살아왔는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관통해왔다는 게. 근데 이 이야기를 나만 알고 있는 게 짜증나니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그게 광대적인 기질인 것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알려주기 힘든 이야기를 영화로 같이 공유하고 싶고. 그럼 제가 처음에 느꼈던 놀라운 감정을 관객분들도 느끼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두려움이나 불안감 같은 건 없었어요."
'공작'의 배우 황정민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5월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의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공식 초청된 '공작'. 공식 상영회 당시 쏟아진 외신의 호평 세례에도 황정민의 가슴에는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있었다.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순 있었으나 '공작'이 그리는 분단국가의 아픔은 함께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국 사람들은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세세한 감정은 모르잖아요. 그냥 장르 영화로 보죠. 그래서 이건 빨리 한국 가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단박에 들었어요. 시사회 때 배우들과 영화를 같이 보는데, 사람들과 같이 보고 있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은 거에요. 이건 우리만 아는, 우리만 느끼는 에너지잖아요. '이거였지' 싶더라고요."
'공작'의 배우 황정민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황정민은 박석영이라는 인물의 신념이 궁금해 '공작'에 더욱 몰두하게 됐다. 박석영의 실제 모델인 박채서 씨를 만났다는 황정민은 그와의 만남을 '신기한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영화는 이야기를 재창조해내는 거잖아요. 전 프레임에 갇힐까 봐 작품과 관련된 분들은 원래 잘 만나려고 하지 않아요. 근데 시나리오를 읽고 박석영이라는 인물이 너무 궁금했어요.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난다는 게. 저였다면 심장이 터졌을 텐데. 그 강골이 궁금했어요. 그 분이 출소하신 뒤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눈을 읽을 수 없더라고요. 원래 사람의 눈을 보면 성향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 분은 읽어낼 수 없는 벽 같은 느낌이었어요. 너무 신기한 경험이더라고요."
냉전의 남북관계를 배경으로 칼보다 강한 구강 액션을 탄생시킨 '공작'. 매 장면을 액션 신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다는 윤종빈 감독의 바람이 성취됐지만, 선 굵은 배우들도 땀을 흘리게 한 작품이다. 배우들의 노고가 컸다.
"촬영장에서 이런 압박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어요. 매 신을 액션 신처럼 만든다는 게 말이야 쉽지, 어떻게 말을 하는데 액션처럼 느끼게 할 수가 있어요. 앞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탁상 위에선 양날의 칼이 날아다니잖아요. 이런 2중, 3중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알려야 하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성민이 형한테 '힘들다', '우린 죽어야 한다', '배우 그만하자' 이런 얘기도 했어요. 바닥을 치게 되는 거죠. 쉽게 생각한 것도 있어요. 평소 방식대로 하면 되겠거니 했다가 큰코 다친 거죠."
'공작'의 배우 황정민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래서 학생 때 작품을 준비하듯, 연극을 준비하듯 매 장면과 호흡의 디테일을 한 땀 한 땀 맞춰갔다. 서로에게 의지했고, 신중한 접근과 합의로 극의 긴장감이 촘촘히 쌓이기 시작했다. 호흡은 수월해졌고, 배우들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이번 작업을 통해 현장의 참 의미를 되새겼다는 황정민이다.
"연기를 정말 잘하는 사람과 연기하다 보면 현장이 행복해요. 형한테 너무 고맙죠. 형 덕분에 흑금성이라는 인물도 다양한 느낌으로 나온 것 같고. 배우들끼린 연기에 대한 얘기를 잘 안 하거든요. 근데 '공작'은 그게 아닌 거에요. 내 밑바닥을 드러내게 되는 거죠. '도와주세요', '나 이것밖에 못 하는데' 하고. '너도 힘들었니?' 하며 서로 얘기가 되고 안 되는 부분을 조금씩 채워가고. 그래서 더 든든하고. 영화란 사실 이렇게 공유하는 작업인데. '언제부터 어깨에 힘만 들어가고 가오만 세웠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기분 좋게 촬영했어요."
'공작' 덕분에 고질적인 매너리즘을 깨달았고, 올해 초 '리차드 3세' 무대에도 올랐다. 10년 만의 연극 복귀작이었다. 대사의 장단음을 정확히 구분해 연기해야 하는 만큼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심기일전해 연기 인생의 새로운 막을 올렸다. 오는 12월 크랭크인하는 윤제균 감독의 SF 휴먼드라마 '귀향'을 "정말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황정민에게 기대가 높아지는 시점이다.
"황정민이 우주복을 입는다? 상상이 안 되는데 기대돼요. 한국에서 우주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제가 이 작품을 결정했던 이유 중 하나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SF 영화를 한다는 거였어요. 처음이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설렘을 주잖아요. 욕은 더 많이 먹겠죠. 처음이니까.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첫발을 내디디는 게 얼마나 재밌고 흥분되는 일인데요. 게다가 '공작'으로 바닥을 찍어봤기 때문에 잘할 수 있어요.(웃음) 저 진짜 잘할 거예요."
'공작'의 배우 황정민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미디어펜=이동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