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된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주인 얼굴 [사진=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전남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에서 지난 2014년 출토한 화려한 백제 금동신발의 주인은 5세기 후반 혹은 6세기 초반에 사망한 40대 여성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오동선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특별전이 진행 중인 국립나주박물관에서 11일 열리는 '고대 동아시아의 금동신발과 금동관' 국제학술대회에서, 이런 내용으로 정촌고분 1호 석실 매장의례와 금동신발 특징을 발표한다.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길이가 약 32㎝이고, 너비는 9.3㎝ 안팎이며, 두께는 0.5∼1.3㎜로, 왼쪽 신발 발등에는 용머리 장식이 남아있으며, 다채로운 문양을 새겼다.
오 연구사는 10일 공개된 발제문에서 "석실에는 세 기의 목관이 안치됐는데, 유물이나 층위로 안치 순서를 파악하기는 힘들다"며 "금동신발은 흐트러지지 않고 포개진 상태여서, 원위치에서 크게 이탈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는 목관에서 찾아낸 두개골이 금동신발 주인공의 인골일 가능성이 있다는 법의학적 소견을 소개하고 "인골은 40대 여성의 뼈로, 키가 146㎝로 추정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대 최고급 비단, 목관재로서 금송을 사용한 인물이 여성이었다"며 "6세기를 전후한 시점의 영산강 유역 사회는 여성 지위가 지역 수장급에 해당할 정도로 높았다"고 분석했다.
금동신발 제작 시점은 백제가 한성도읍기에서 웅진도읍기로 넘어가는 5세기 후반으로 봤다.
오 연구사는 "금동신발 내부에서 확인한 흙에서 검정파리과 파리 껍데기를 수습했는데, 검정파리과는 9∼10월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다는 점에서, 금동신발 주인의 사망 시점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며 "금동신발 주인은 최소 6일간 시신을 외부에 둔 빈장(殯葬)을 한 것 같다"고 판단했다.
한편 성윤길 나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금동신발 문양을 연구해 측판 육각문을 기본으로 용, 새, 지신(地神), 지축(地軸), 만세, 봉황, 기린, 연화문, 괴수상 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자(死者)의 최종 목적지인 천계(天界)로의 승천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며 "용머리 장식은 이동 수단으로써의 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하다"고 주장했다.
성 연구원은 일신양두(一身兩頭)형 지신과 지축에 주목하면서 "이 문양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용 형상과 새, 천추, 만세, 괴수상 형태가 고구려 문양과 흡사하다"며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백제와 고구려가 문화적으로 교류한 양상을 보여주는 역사상 흔적"이라고 해석했다.
학술대회에서는 정촌고분 금동관, 고대 중국 금은기(金銀器)와 상장의례, 고대 중국의 보요관(步搖冠) 고찰, 고대 일본 금동신발과 금동관에 대한 연구 성과 공개가 이뤄진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