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년 전 TV 뉴스에서 봤던 장면이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추징금 18조(兆)원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그 직전 공식 석상에 잠시 등장해 대우그룹 해체와 관련된 소회를 15년 만에 밝힌 뒤 퇴장하는 김우중 전 회장에게 우르르 몰려간 취재진이 그렇게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건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폭언 내지 비아냥에 가까웠다. 취재기자들의 거친 태도에는 국민 다수가 품고 있는 반(反)기업정서가 매우 공격적인 형태로 반영되어있다. 당시 포털 기사에 달려있는 댓글도 험악했다. "(대우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요구하기 전에 미납 추징금부터 토해내라.", "당신 때문에 투입된 혈세가 수십 조 원…."
이게 무얼 얘기할까? 우린 아직 대우 김우중 회장과 현대사 속의 대우 신화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놓고선 그가 타계한 뒤 "재계에 큰 별이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건 공허한 추모이거나, 아니면 무지한 것이 아닐까? 다행인 것은 고인의 삶이 완전히 잊혀진 것만은 아니란 점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사진은 지난 2014년 10월 30일 제주대학교에서 '자신감으로 세계와 경쟁하자'란 주제로 특강하는 김 전 회장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왜 공허한 추모를 반복하는가?
사실 대우 신화와 예전 IMF 외환위기와 뒤이은 대우그룹 해체는 경제사·기업사의 결정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이걸 재대로 해석하고, 김 회장의 진면목 재발견을 통해 저성장에 신음하는 한국경제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거기에다 훌륭한 텍스트도 있다. 고인이 5년 전에 펴낸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신장섭 지음, 북스코프 펴냄)도 뜯어볼수록 탁월한 증언이다.
나는 안다. 대우는 아직도 뜨거운 얘기다. 부실한 재벌은 한국경제에 공공의 적이고, 구조조정은 필수였다는 환란(換亂) 당시 김대중 정부가 유포시켰던 고정관념이 아직도 지배적이다. 그런 짧은 인식이 IMF 이후 20년 가깝게 저성장에 시달리면서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런 고정관념을 버리고 '사람 김우중'의 소신과 격정 그리고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게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이다. 경제 거인 김우중의 육성을 듣기에 괜찮은 기회이고, 개발연대의 빛과 그늘을 성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기업은 결국 창업주가 가진 비전의 확장이 아니던가?
자본금 500만 원으로 시작해 1998년 해체 전 매출 71조 원의 국내 재계순위 2위였던 대우 사령탑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보는 이의 정신이 확 들도록 눈에서 불을 뿜던" 사람이었다는 게 배순훈 전 대우전자 사장의 회고다. 한국기계를 인수한 직후였던 나이 만 40세의 김 회장은 배순훈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가진 자들은 국가에 대한 기여와 헌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오래 전 몸에 밴 경영철학이었음을 훗날 재확인했다. 동시에 그는 무주(無酒), 무유(無遊), 무색(無色) 의 3무(無) 인간이다.
술 마실 줄 모르고, 놀지도 못하며, 여자 스캔들 역시 없다는 게 <김우중과의 대화>의 저자인 신장섭 교수의 말이다. 선진국 사람들이 나인 투 파이브(아침 9시에서 오후5시까지 근무)로 일한다면, 한국인은 파이브 투 나인으로 일해야 한다고 김 회장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국가에 대한 기여와 헌신을 강조하는 금욕주의자였다.
그런 창업주 김우중의 지휘 아래 대우의 신화가 이 땅에 펼쳐졌다. 하나하나 말뚝 박아가며 성장했다는 현대, 삼성과 또 달리 대우는 성큼성큼 뛰었다. 현대와 삼성이 기술자 창업주의 손으로 컸다면, 대우는 화이트칼러 출신의 김우중이 주로 인수합병(M&A)방식으로 급성장을 거듭했다.
김우중은 재계의 대선배 정주영, 이병철 두 분과 나이가 20살 내외로 벌어졌지만, 전경련 회장에 오르기 전에는 재계 모임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너무 빠르게 성장했고, 박정희 대통령과 배석자 없이 독대하기를 밥 먹듯 한다는 소문까지 겹쳐졌으니 질시와 오해가 커졌고, "김우중은 사기꾼"이라는 헛소리도 퍼졌다.
2017년 초 서울에 잠시 들렀던 대우 김우중 회장을 모시고 식사자리에서 찍은 기념 사진. 사진 왼쪽부터 좌승희 회장, 이인호 교수, 김우중 회장, 언론인 조우석. /사진=미디어펜
금욕주의자 김우중의 진면목
본인 스스로는 해방 후 한글로 교육 받고 대학교육까지 받은 첫 기업인 세대라는 자부심이 컸다. 동시에 정주영 회장, 이병철 회장 등 한국기업사의 큰 이름과 공유했던 가치도 명백했다. 국가발전에 대한 기여가 그것이다. 김우중은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을 기업의 목표로 삼았다. 대우의 사훈(社訓)이 '창조 도전 희생'인 것이 우연이 아니다.
대우의 칼러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삼성이 전자와 금융에 강했지만 중화학산업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해외건설 시장도 늦게 진출했다. 현대는 중화학산업과 해외건설에서 강점이 있었지만 경공업수출에는 내놓을 만한 게 없었다. 대우는 한국경제 개발의 3박자인 경공업 수출, 중화학 산업, 해외건설을 묶어 성장했다.
실제로 봉제품 수출로 일어선 뒤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인수 이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옥포조선(대우조선)을 차례로 인수했는데, 그 과정은 1960~70년대 한국경제의 도약과 완전 일치한다. 흥미로운 건 그는 본래 금융업 쪽으로 뻗어나갈 꿈을 가졌지만,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권유와 회유로 방향을 바꿨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수의계약에 따른 중화학공업 인수는 지금 시각으로 보아 특혜가 명백하고, 이 과정에서 거액의 정치자금을 주고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정경유착에 대한 의혹을 김우중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해명하는데, 나는 그게 액면 그대로의 진실이라고 믿는 쪽이다.
"정부에서 나한테 떠맡기다 보니까 수의계약이 된 거지요. 그리고 경제발전을 하려면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서 잘해야 돼요. 그걸 놓고 정경유착이라고 매도하면 안 됩니다.…장사꾼이 돈만 바라보고 일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준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66쪽)
오해 마시라. 그건 김우중 개인의 변명이 아니다. 개발연대의 시대정신이자, 국가적 합의였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멋지다. 그 시대를 이끌던 최고지도자인 대통령과 창업주 사이의 그런 교감을 지금 우리는 정경유착의 스캔들로 규정해 훼손하기에 바쁘지만, 누가 정말 바보일까? 이런 고정관념은 IMF 개혁 프로그램의 칼을 들었던 경제관료에게는 집착에 가까웠고, 그건 대통령 김대중이 더했다.
그의 대중경제론은 노골적인 평등주의 성향으로 색칠됐다. 그래서 저들은 "재벌과 대기업을 손보자"며 인적 청산도 불사했다. 나는 믿는다. 그 회고록의 인터뷰어인 신장섭 교수가 밝힌대로 김우중 회장 야심의 종착역은 매출 극대화과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국가였다.
그런 상식이 훗날 정경유착에 관치금융에 중복투자로 매도당하고 난타당하는 게 한국사회의 불행이 아닐까? 그게 지금 한국경제에 독으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경제 거인 김우중 회장 바로보기는 그래서 우리경제와 현대사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고인의 영면을 제대로 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임이 분명하다는 뜻을 재삼 밝힌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