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태우 기자] 제주항공이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이스타항공이 제주항공의 셧다운(운항중단)과 구조조정 지시 증거를 공개하면서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항공 업계에서는 제주항공이 결국 이스타항공을 인수할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반응이다. 설사 두 항공사간 인수합병(M&A)이 무산되더라도 이스타항공의 경영악화에 기름을 부었다는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6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이스타항공 조종사노동조합은 지난 3월20일 최종구 이스타항공 대표와 이석주 전 제주항공 대표(현 AK홀딩스 대표)가 나눈 통화 녹취록을 공개했다.
제주항공과 이스타항공의 인수합병(M&A)이 폭로전 양상으로 번지며 무산될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녹취록의 핵심은 셧다운과 구조조정, 임금체불 총 3가지다.
이스타항공 측은 제주항공이 국제선과 국내선 모든 노선을 전면 중단하도록 종용했고, 인력감축을 진행하기 위해 고용유지지원금 신청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또 체불임금은 인수 주체인 제주항공이 모두 부담키로 했다고 언급했다.
반면 제주항공은 인수 절차가 아직 진행 중인 상황에서 셧다운을 지시할 수 없고, 이스타항공 경영진의 자의적인 판단이라고 반박했다. 인력감축이나 임금체불과도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노조가 공개한 통화 내용을 살펴보면, 제주항공 측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녹취파일에서 최 대표는 "셧다운이라는 게 항공사의 고유한 부분이 사라지는 것인 만큼, 조금이라도 영업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이에 이 전 대표는 "지금은 셧다운하는 것이 나중에 관(官)으로 가더라도 맞다"고 답했다.
또 최 대표가 "중요한 국내선 슬롯이 몇 개 있는데, 이게 없어지면 M&A의 실효성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자, 이 전 대표는 "우리가 각오하고 있다. (슬롯이 없어지면) 국토부에 가서 뚫겠다"고 말했다.
체불된 임금과 관련해서도 이 전 대표는 "딜 클로징(거래종결)을 빨리 끝내자"면서 "그럼 그거(미지급된 임금)은 우리가 할 것"이라며 최 대표를 안심시켰다.
사실상 제주항공이 인수 주체로서 경영에 개입했다는 명확한 증거인 셈이다.
또 노조가 추가 공개한 양사 경영진 회의록에서도 제주항공이 기재축소에 따른 직원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이스타항공이 계획은 있지만 급여 체납으로 시행 시점이 늦어지고 있다고 전달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스타항공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급격히 확산하던 올해 3월 국내 항공사 중 처음으로 전 노선 운항을 멈추는 셧다운 사태를 맞았다. 이후 4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운항 재개 시점은 가늠할 수 없다.
이 기간 동안 이스타항공의 자금난은 악화됐다. 2월부터 임직원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고, 5월 기준 누적 체불금액만 25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조업비와 항공유류비, 공항사용료 등 체납료만 100억원 이상으로 알려졌다.
이스타항공 측은 제주항공의 지시가 지금의 유동성 위기를 촉발시켰고, 당초 약속에 따라 임금 체불을 해소하고 인수를 서두르라고 주장한다.
제주항공은 이르면 7일께 노조가 주장한 부당 지시와 M&A 관련 입장을 밝힌다는 계획이다.
다만 이달 15일까지 선행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종전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항공이 요구한 선결조건은 타이이스타제트 지급보증(370억원)과 체불임금, 기타 미지급금 등 최소 800억원의 부채 해소다.
업계 안팎에서는 제주항공이 발을 빼기 어려워졌다고 분석한다. M&A 이후 구조조정과 조직 재편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M&A 진행 중에 경영에 개입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스타항공 측 주장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제주항공은 울며 겨자먹기로 이스타항공을 인수할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미 양측간 감정골이 깊어진 만큼, 인수 뒤 정상적인 경영이 가능할지 예단할 수 없다.
인수를 포기하더라도, 경영악화 책임을 지고 막대한 규모의 위로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이스타항공 측에서 소송전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항공업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가 나서 이스타항공과의 M&A 성사를 당부한 점은 제주항공의 부담을 높이고 있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지난 3일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과 이상직 의원을 차례로 만나 면담을 하며 중재에 나섰다.
항공업계 한 관계자는 "제주항공이 이스타항공 경영에 관여한 것은 이른 감이 있지만, 그만큼 인수 의지가 확고했다는 의미"라며 "코로나19로 제주항공의 경영환경도 녹록치 않다. 하지만 정부까지 가세한 만큼, 코 꿰인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미디어펜=김태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