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모든 것을 잃은 폐허에서 유토피아를 논하다니, 누군가는 역설적인 타이틀로 여길지 모르지만 실로 재난을 통해 유토피아가 탄생한다. 대지진 속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는 주민들에게 선택받았다는 특권의식과 함께 생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신세계. 영화는 디스토피아 속 펼쳐지는 유토피아를 통해, 또 유토피아를 보존하려는 이기심을 통해 다시금 인간성의 디스토피아를 그려 보인다.
재난 후 돌발적인 아파트 화재를 막아낸 영탁(이병헌)은 내 집 지키기에 신경이 곤두선 소시민이다. 실리적인 명분으로 움직이고, 공치사 없이 담백한 보통의 사람. 그런 사람이 화재 진화에서 보인 희생정신으로 공을 인정받고, 황궁 아파트의 주민 대표로 선출된다. 이어 황궁 아파트에 몰려온 외부인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영탁은 얼떨결에 또다시 역사를 쓴다.
이젠 상징적인 리더다. 제 보금자리가 가장 소중했던 영탁은 아파트와 주민들로 영역 보전의 욕망을 넓히고, 이 속에서 크고 작은 성취를 맛본다. 내 사람들을 지킨다는 숭고한 사명과 지역사회를 이끄는 권력의 풍요로움, 생존의 문제를 넘어선 자아실현의 기쁨까지. 거부하기 어려운 달콤함이리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제대로 읊지도 못하면서 그 정신을 이어가려는 영탁의 모습에서 파멸은 이미 예고된 듯하다. 영탁이 운명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국수주의를 키워가며 유토피아 안팎 균열은 점점 커진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이들의 헤게모니는 악랄한 신화로 진화한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읜 민성(박서준)은 가족의 안위와 안정적인 삶이 최우선이다. 그래서 영탁을 도와 황궁 아파트 지키기에 앞장선다. 남편의 선한 본성을 아는 명화(박보영)는 민성의 방위 활동과 변해가는 그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그녀에게 삶이란 타인을 배척하지 않고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사는 것이 팍팍하고 캄캄해도, 괴물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영화는 운명 공동체로 묶인 세 인물을 중심으로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규합, 시스템 구축, 해체까지 유토피아의 대서사시를 써내려간다. 한정된 공간에서 보통 사람들의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관객들은 휴머니티의 상실을 부정하면서도, 모두의 입장이 납득되는 혼돈으로 이 이야기를 지켜보게 된다.
노골적으로 선악을 구분 짓지 않은 채 지극히 현실적인 화법으로 균형을 지킨 엄태화 감독의 연출 덕이다. 그러면서도 엄태화 감독은 끝끝내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인간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길이자 스스로에게 구원받는 일임을 이야기한다. 온갖 혐오가 만연하고 인류애가 낡은 개념이 된 시대에서 단순명료하고 사려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OTT 콘텐츠의 홍수 속 관객들의 선택이 까다로워진 극장가 환경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상업영화로서 본분을 다한 작품이다. 인물들의 입체적 변화를 유려하게 그려내고, 세기말적인 분위기와 가슴 철렁한 사건사고들의 연속으로 한순간도 몰입을 끊지 않는다. 초현실적 배경 속 현실적 갈등과 선택의 순간들이 어우러져 가슴에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예산을 참으로 영리하게 썼다. 22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인데, 대규모 재난을 그려낸 CG 장면들도 상당한 압도감을 준다.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들을 간결하게 사용하면서도, 공간감이 주는 쾌미는 최대한으로 충족시킨다.
빛과 어둠을 끊임없이 교차시켜 인물의 명암(明暗)을 비추는 엄태화 감독의 연출은 탄성이 나온다.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맹렬히 발화하는 캐릭터의 얼굴을 따라가다 보면, 그 모습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를 확인하고 흠칫 놀라게 된다.
모든 것을 잃은 서울의 아침 풍경은 쓸쓸하지만 희망차고, 따뜻하지만 서글프다. 인간성이 사라진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면서 역설적으로 또다른 희망의 도래를 기다리는 연출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막 잠에서 깨 엄마를 찾으며 우는 아이처럼 외롭고 낯설지만, 우리가 마주한 길을 떳떳하게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미디어펜=이동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