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같지 않은 영향력…공공재 아닌 방송 관치시대 유산은 이제 그만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전 KBS PD
한국방송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공영방송 KBS를 중심으로-

한국방송 KBS는 2017년 개국 90주년을 맞는다. 90세의 나이를 구순(九旬)이라고 하지만 졸수(卒壽)와 동리(凍梨)라는 표현이 있다. 졸수는 ‘죽을 나이’를 뜻하고 동리는 ‘얼은(凍) 배(梨)’라는 뜻으로 90세가 되면 마치 배 껍질처럼 검버섯이 피기에 붙이는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고대에는 생산력에 한계가 있어서, 생산력이 없는 노인이 너무 오래 살면 가족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방송 KBS도 공영방송이라는 이름으로 90년을 맞았지만, 이제 인터넷과 SNS, 다매체, 다채널, 개인미디어 시대를 맞아 그 영향력이 과거와 같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공영방송이라는 정체성마저 그 당위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하는 상태에 우리는 와있다. 이와 함께 KBS뿐만 아니라, 한국의 방송문화와 제도 전반에 새로운 혁신의 계기가 필요하며 방송의 공공성과 다양성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 전환의 시기가 닥쳤다고 할 수 있다.

Ⅰ. 한국방송의 과거 - 일제시대 관치 라디오방송 1)

한국방송 KBS는 1927년 2월16일 일제 관치의 경성방송 라디오(JODK)로 시작했다. 

송출 당시 라디오 방송 환경은 열악했는데 당시 등록된 라디오는 1,440대에 불과했다. 이어 6개월 후인 8월까지 보급률은 3,684대 수준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관심은 높아서 1927년 7월 4일 동아일보에는‘라듸오기器도적, 긔계 곳처준다고 도적질’ 기사가 날 정도로 수리공을 사칭한 라디오 도둑이 극성이었다. 라디오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보통 제품은 40원대. 고급품은 1,000원이 훌쩍 넘었다. 방송국 기술직 신입사원 월급이 2원이던 물가를 감안하면 라디오는 가히 부의 상징이었다. 청취료와 부속품을 교환하는 데 월 4원이 필요했다.

초기 프로그램은 뉴스, 음악, 소설 낭독 위주였다. 1930년대엔 라디오 드라마라는 새 장르가 인기를 끌었다. 방송 사고도 흔하게 일어났다. 경성방송국 개국 이듬해인 1928년, 꾀꼬리 울음으로 새해를 알리겠다는 기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세 마리 꾀꼬리가 침묵을 지켜 30분간 침묵 방송이 나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예능프로그램 주역인 기생들이 출연을 거부하는 사태도 종종 있었다. 당시 출연진의 절반을 차지했던 일본 기생의 출연료가 문제였다. 출연료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최대 난제는 운영 자금이었다. 청취자로부터 2원씩 징수하는 수신료로는 제작비를 감당 하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조선인 청취자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개국 초기 경성방송국은 오전 6시에서 오후 11시까지 하루 17시간 동안 일본어와 조선어 방송을 각각 7대 3 비율로 내보내는 기형적인 편성이었다. 당연히 조선인과 일본인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게다가 수신료 2원도 청취자 불만의 원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디오 보급률도 문제였다. 라디오 보급 대수가 늘어난 것은 조선방송협회가 1933년 4월부터 900㎑의 경성 제1방송(일본어)과 610㎑의 경성 제2방송(조선어)으로 분리하는 ‘2중 방송’을 진행하면서였다. 이를 위해 협회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서세교리(현 서울시 연희동)에 10㎾급 연희송신소를 세웠다.

1935년 경성방송국은 호출 명칭을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바뀌었다. 이는 같은 해 개국한 부산방송국을 필두로 청진·평양(1936년), 이리(1937년), 함흥(1938년) 등 지방에 방송국이 잇달아 설치된데 따른 것이었다. 이후 대구, 광주, 대전, 목포, 원산, 혜주, 마산, 성진, 춘천, 제주 등 10개 도시에 지방 방송국이 추가로 개국했다. 보급된 라디오 대부분은 수도권 인근에서나 겨우 청취 할 수 있는 감도 수준의 광석 수신기였다. 그나마 고급 전지를 사용하는 고성능 진공관 방식은 서울 지역에서 극히 소수만 가지고 있었다.

경성방송국은 일본어와 조선어 2중 방송을 하면서 방송 자료의 절대 빈곤으로 곤혹을 치렀다. 당시 재방송용 자료로 사용됐던것은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레코드판뿐이었다. 경성방송국에 방송자료를 직접 녹음할 수 있는 녹음기가 도입된 시점도 1939년이었다. 이때 도입된 녹음기는 일본화학연구소가 제작한 명반석(Alumite) 원반을 이용해서 만든 기계식이었다. 1940년에는 일본자기 녹음연구소가 개발한 자기식 녹음기가 선을 보였다. 당시 자기식 녹음기는 녹음선 삭제를 통해 여러 번 반복 사용할 수 있는데다 녹음 즉시 재생이 가능한 혁신적인 발명품이었다.

   
▲ 그림1. 경성방송의 경영적자 비판 기사./사진=(좌)1927.4.21 동아일보, (우)1927.5.1 동아일보


<평가: 일제 군국주의 관치경제는 결국 경성방송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일제 총독부에 의해 시행된 경성방송은 식민지 경영이 목적이었고 비상시에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는 전략적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당연히 방송시장에 시장경제의 원리를 도입한다는 개념이 없었기에 일제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지 못했다. 일본의 경우 1925년 NHK가 독점방송으로 전후까지 하나의 채널만 운용했으나 미국에서는 1921년 10개, 1922년 219개, 1924년에는 민간에 530개의 라디오 방송사가 존재했다. 라디오 수신기 판매 역시 증가해 미국 가정의 라디오 보급률은 1925년 10%, 1927년 20%, 1929년 30%, 1930년 40%, 1931년 50%를 넘어서게 됐다.2) 

일제 식민시기이기는 했지만 1920년대에 라디오가 조선 사회에 도입되면서 새로운 근대적 생활양식들이 나타났다. 경성방송의 프로그램은 보도, 교양, 오락의 세 분야로 구성됐다. 뉴스, 기상예보, 주식기미, 물가정보 등의 보도와 각종 강좌 및 강연의 교양, 그리고 음악 및 드라마 등의 오락 프로그램들이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아나운서와 같은 새로운 직업군을 창출했으며, 대중 스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라디오의 활용은 새로운 풍조를 낳았다. 카페나 상점에서는 손님을 끌기 위한 마케팅으로 라디오를 활용했다. 또한 라디오는 가정 오락매체로 자리하면서 단란하고 교양 있는 신가정(modern home)의 상징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한편 경성방송이 내보내는 음악 방송은 라디오를 서양 음악의 학습 매체로 기능하게 했고, 라디오 시보는 근대적 시간체제를 구축하는 중심축이 되기도 했다.3)

Ⅱ. 해방 후 미군정하의 한국의 방송: 공정성, 객관성 의무, 자유민주주의 이념

1945년 8월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을 알린 방송은 다름 아닌 일제가 세운 JODK라디오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경성방송국이 일본이 항복한 8.15일 정오이후에도 약 한 달가량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방송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일제 식민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일본이 이식한 근대문화의 주류적 위상과 규범성을 확인하는 사건일 수 있다. 즉 36년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항일성은 생각보다 조선 민중들 사이에 규범력이 크지 않았을 수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미군정 체제에서 경성방송은 '서울중앙방송'으로 개명되었고, 미군정청 공보부 산하에 편입되었다. 미군정 체제 하에서 라디오 방송 시스템은 변화를 겪게 된다. 미국인들은 1930년대 라디오 황금기를 이미 경험한 바 있었고, 상업방송 체제로서 방송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정시방송을 실시하고 편성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방송이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생각은 미군정의 방송규칙에서 시작됐다.

미군정으로부터 「라디오 방송규칙」을 받아 중앙방송국은 「방송뉴스편집요강」(이덕근(李德根) 작성)을 발표했다. 그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 뉴스는 객관적인 사실로 새로운 의미를 가져야 한다. ② 뉴스는 신속 정확해야 하며, 그 편집은 불편부당, 공평무사해야 한다. ③ 아무리 새 의미를 갖는 뉴스일지라도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경조부박하거나 사회 풍속상 충실 돈독의 미풍을 해치는 것은 편집에 넣을 수 없다. ④ 뉴스는 사회성과 일반성을 가져야 한다. ⑤ 보도 자유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법률로 금지되었거나 공공 이익을 해치는 것은 보도할 수 없는데, 이 점은 조금도 완전한 자유를 저해하는 것이 아니다. ⑥ 보도문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의 6요소를 갖추어야 한다.4)

☞ 남로당의 중앙방송국 적화공작사건

이러한 규칙이 생겨난 데는 배경이 있었다.

1946년 9월 24일 철도 파업 그리고 체신 노동자들의 파업이 강행되었고, 1947년 9월 21일 ‘중앙방송국 적화공작사건’이 드러났다. 당시 <동아일보>는 “적화 선전을 꾀하던 남로당원 14명이 1947년 9월 19일 서울지방 검찰청에 송치되었다”라고 보도했다.

남로당이 내린 지령이 문제가 되었는데, “① 방송국 직원 전원을 남로당 세포에 가입시킬 것(전 국원 4분의 1을 포섭),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 사상을 일반 청취자에게 주입시킬 것, ② 좌우익의 정치 방송은 가급적 방송을 회피하도록 하고 만일 방송을 할 때는 기계 고장을 구실로 하여 암암리에 방송을 방해해 일반 청취자가 청취하기 곤란토록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5)

그 사건으로 1947년 9월 19일 김응환(金應奐) 외 12명은 「무선전신법」과 포고 제2호 「군정법」 제19호 위반, 「형법」 제78조 위반 혐의로 서울지방 검찰청에 구속되었다. 그 후속 조치로 미군정 공보부는 「라디오 방송규칙」 9개항을 시달했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① 공중의 이익과 편의, 기록 공중의 관심이 걸려 있는 성격의 보도와 공중의 필요를 위한 발표이어야 함과 동시에 진리와 공정과 정당한 봉사적 견지에서 허 · 불허를 결정한다. ② 모든 발표는 개인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그 보도 통계 혹은 의견의 출처 및 책임자를 명시할 것”이라고 했다여기에서 공정성이란 말이 우리 언론에 처음 사용되었다.6)

미군정 때의 방송은 미국의 상업방송 형식을 이식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유행하던 프로그램들을 모방한 퀴즈쇼, 드라마, 뉴스해설 등이 주요 방송 내용을 차지했다. 또한 비용 조달을 위한 스폰서 프로그램들 역시 도입됐다. 한편 미군정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했다. 〈군정청 뉴스〉,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계되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 등을 내보내면서 미국의 이념과 생활 방식을 한국의 국민들에게 전달했다.7)

   
▲ 공영방송을 KBS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도 과거 관제, 관치시대의 유산이며 자유롭게 경쟁하는 방송시장에서는 시장의 원리로 천박한 방송들도 범람하겠지만, 지금보다 더 유익한 방송도 등장하게 된다./사진=KBS 로고


Ⅲ. 정부수립 이후 현재까지

1948년 정부 수립이후 방송은 여전히 정부 독점하에서 운영됐다.당시 이승만 정부는 KBS 라디오 방송을 국민통합과 계몽의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6.25전쟁 이후 라디오가 없는 농가에는 확성기를 라디오에 연결해 <앰프촌>이라 불리는 공공 서비스를 시행하기도 했다. 

국내 최초의 민간방송은 기독교방송(CBS)이 1954년에 개국한 데 이어, 부산문화방송(1959), 문화방송(MBC, 1961), 동아방송(DBS, 1963), 라디오서울(RSB, 1964, 후에 동양라디오 TBC로 변경) 등 민간 상업 라디오 방송이 잇달아 설립됐다. 이들 방송사는 오락 프로그램을 대량 편성하며 청취율 경쟁에 돌입했고, 오락 매체로서 라디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물론 1960년대에 KBS TV(1961. 12. 31), TBC TV(1964. 12. 7), MBC TV(1969. 8. 8)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TV수상기의 보급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라디오가 지속적으로 사회문화적 매체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KBS는 1961년 12월 31일 호출 부호 HLCK, 채널 9번으로 국영 TV방송을 개국해 본격적인 한국 TV 방송의 역사를 시작했다. KBS TV의 개국 당시 명칭은 '서울 텔레비전 방송국'이었다. 이어 KBS는 1973년 한국방송공사로 공영방송 체제로 전환했으며, 2001년부터는 한국방송공사를 'KBS 한국방송'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KBS는 TV 수신료와 광고 수입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공영성 강화를 위해 KBS1과 제1라디오는 1994년 10월 이후 광고를 하지 않고 있다.

KBS는 현재 KBS1과 KBS2 그리고 위성방송 KBS Korea, KBS World 등 네 개의 TV 채널을 운용하고 있다. 1, 2, 3 라디오와 1, 2 FM 그리고 사회교육방송과 RKI 등 7개 라디오 채널을 운영하면서 TV와 라디오를 합해 매주 260여 프로그램을 송출한다. 특히 글로벌 네트워크화 실현을 위해 KBS World를 운영해 2005년부터 영어 자막 방송을 제작·방영하고 있으며, 2004년에는 미국을 거점으로 하는 KBS America를 설립하기도 했다.

조직 면에서 KBS는 주요 정책을 심의·의결하는 이사회와 집행기관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이사회는 KBS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해 경영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최고 의결기관이다. 이사회는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11명으로 구성되며, 이사는 각 분야의 대표성을 고려해 방송위원회에서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또한, 집행기관으로 사장 1인과 2인 이내의 부사장, 8인 이내의 본부장과 감사 1명을 두고 KBS를 운영해 나가고 있다. 2004년 이후 KBS는 경영 혁신과 구조 조정에 나서면서 기존 국·부제 조직을 2004년 8월 팀제 조직으로 개편했다. 이로써 KBS는 본사 6본부 5센터 98팀, 지역 9총국 9지역국 39팀의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KBS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공정방송을 할 수 있는 제도 장치로 수신료 인상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010년 11월 이사회를 통해 현행 2500원인 수신료를 1000원 인상시켜 3500원으로 한다는 내용의 안을 의결,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수신료 인상안은 방송통신위원회를 거쳐 1981년 이후 30년만인 2011년 6월 국회 상정을 눈앞에 두고 민주당 의원의 반발로 무산됐다.

KBS는 2008년 이병순 전 사장에 이어 2009년 김인규 사장이 취임함으로써 내부 출신 사장 체제를 이어가고 있다. KBS 직원들과 노동조합은 이병순 전임 사장에 대해 KBS 신뢰도 하락, 편파 인사문제를 이유로 혹독한 평가를 내렸으며, 김인규 사장도 이명박 대통령 특보 출신의 낙하산 인사라는 이유를 들어 김 사장의 출근저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KBS 새 노조(제2노조)는 공정방송 실현을 이유로 2012년 3월 2일부터 94일간 파업을 단행했다. 노사 양측은 합의문을 통해 대선 공정방송위원회 설치와 탐사보도팀 부활 등 공정방송 실천을 위한 구체 방안을 마련하고 파업을 끝냈다.8)

Ⅳ. KBS의 문제점

(1) 좌편향 이념 노조의 편성 장악

KBS는 그 출범의 모태가 일제 총독부의 관치 방송이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 지도하에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전파와 함께 공정성, 객관성이라는 방송의 책임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이후 KBS는 국가기간방송이라는 이름으로 공영방송의 자리를 지켜왔다. 이러한 KBS의 포지션은 결국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 변화와 정권의 향배에 따라 KBS의 방송기조와 보도의 방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87민주화체제 이후, 우리 사회를 급속하게 지배해 온 진보좌파적 이념이 92년 방송노조를 통해 공영방송 KBS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KBS는 노-사간의 갈등이 언제나 정치적 갈등의 대리전으로 펼쳐져 왔다. 

이러한 노-사간의 갈등이 정치적 갈등의 대리전 양상을 띠면서 노조는 KBS의 편성권에도 그 영향력을 미쳐 시청자 참여가 없는 노-사간 공정방송위원회(공방위)를 출범시키고 이를 통해 정치적 갈등이 벌어지는 변태적인 구조를 갖추게 된 것도 사실이다.(2) 반체제 종북성향의 다큐멘터리 방송

KBS는 수신료를 재원으로 운영하는 공영방송이지만, 사실상 공영방송이라는 법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대신 <한국방송공사법>에 의해 규율된다. 이 법에 의해 KBS는 실질적인 독립기관의 성격을 보장받기에 시청자주권이 통용되지 않는 점이 존재한다. 즉 현재 수신료는 공영방송의 서비스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TV수상기를 보유하고 있는 이유로 부과되고, 그러한 수신료도 KBS의 자기경영책임에 의해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력의 전기요금에 부가되어 징수되는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렇듯 KBS의 수신료가 시청자를 준납세자로 다루기 때문에 KBS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짐에도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은 이념 편향적 방송행태를 보여 온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례1)  <뿌리 깊은 미래>

2015년, KBS는 논란이 됐던 광복70주년 다큐멘터리 ‘뿌리 깊은 미래’를 2부작만 방영하고 나머지 방송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과 6·25를 설명하면서 곳곳에 대한민국 건국사에 배치되는 주장을 심었다. 예를 들어 흥남부두 철수는 북한 공산주의가 싫어서가 아니라 미국이 원자탄을 원산에 투하하려 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든가 대한민국을 ‘남녘’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6·25가 북한의 남침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 보수성향의 시청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6·25 와중에 북한 인민군이 자행한 학살만행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국군에 의한 보도연맹에 대한 총살집행과 같은 사실만을 ‘억울한 죽음’으로 표현해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KBS가 국민들의 준조세인 수신료로 운영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KBS가 표방하는 ‘국민의 방송’에서 KBS가 생각하는 국민은 누구인지 묻게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례2)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2012년 KBS는 정권말의 공백기를 틈타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편을 방송했다. 정율성은 <인민해방군가>와 <조선인민군가>로 대표되는 군가, 행진곡 작곡가였다. 6·25 때는 중공군으로 지원해 참전도 했다. 당시 KBS는 그러한 정율성에 대해 일방적인 미화 다큐로 방송을 내보냈다. 프로그램에서 <인민해방군가> 외 다른 군가는 전혀 다루지 않았고 또 다른 대표곡으로 정율성이 북한군에 전쟁을 잘 하라고 만들어 준 <조선인민군가>는 일체 언급이 안 됐다. 대신 모호한 항일행적과 <연안송>, <연수요>처럼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덜한 노래 몇 곡을 소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는 말미에 역사학자도 아니고 음악전문가도 아닌 김대중 정부 당시 정보분야 책임자가 나와서 ‘이런 분도 외면하지 말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자’는 멘트로 결론을 내렸다. 이에 KBS 공영노조는 ‘추악한 프로그램 정율성보다 더 추악한 제작자들과 간부들’이라는 성명을 통해 이 프로그램의 부당성을 비판했던 바 있다.

이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여당 측 위원들이 “정율성은 대한민국을 침략해 파괴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데 가담했다”며 “헌법적 가치에 반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비난하자 다큐를 제작한 박건 PD는 한 매체에 보낸 글에서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측을 북한내 체제 옹위파와 등치시키며 “내가 수호하고 싶은 체제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해 잘 먹고 잘사는 그런 체제가 아니다”라고 강변했던 바 있다.

(3) KBS의 비정상적 경영 행태

KBS의 수신료가 지금처럼 국민의 준조세로 징수되는 것이라면 KBS는 대한민국 헌법이 명시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규범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자유를 누리려면 KBS는 스스로 수신료를 거부하고 민영방송으로 나서든지, 아니면 시민모금을 통한 또 다른 공영방송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어느 국민도 KBS에 수신료를 납부하면서 자신의 이념과 가치에 맞지 않는 방송을 볼 의무가 없으며 보기 싫으면 보지 말라는 태도라면 수신료도 자율납부제로 바꾸는 것이 옳다. 왜 방송 수신료가 무조건 TV 수상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내야 하는 ‘강제 부담금’이라는 건가. 더구나 KBS는 국가가 출연한 세원을 재투자하는 공기업이다. 흑자가 나면 다른 공기업들처럼 배당을 해야 하지만 우리 방송법은 KBS 공영방송의 발전을 위해 이익금을 배당하지 않고 국회 동의를 얻어 유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실제 국회는 늘 KBS의 배당 유보에 손을 들어 줬다. 그리고 적자가 날 때는 KBS에 지원을 해줬다.9) 

   
▲ 한국방송 KBS도 공영방송이라는 이름으로 90년을 맞았지만, 이제 인터넷과 SNS, 다매체, 다채널, 개인미디어 시대를 맞아 그 영향력이 과거와 같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사진=각 사 로고, 제작=미디어펜

Ⅴ. KBS 한국방송의 미래를 위한 제언

KBS한국방송은 공영방송임을 내세우지만 우리는 아직 무엇이 공영인지, 명확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황이다. KBS임직원들은 공영방송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므로 그러한 요구를 위해서는 스스로 실천의 방안을 국민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1) 자본으로부터의 독립방안 : 광고, 협찬 중단

KBS가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의미는 자본주의 상업논리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의미로 수용되므로, KBS는 수신료 외에 광고, 협찬수입을 중단해야 한다. 동시에 재정에 있어서 자기경영의 책임을 져야한다. 만일 수신료를 인상하겠다면 구조조정의 방안을 제시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산매각과 인원감축과 같은 방안을 제시해야 자본으로부터 독립의 명분이 주어진다. 동시에 공영방송의 내용과 관계없는 2채널의 쇼, 오락, 드라마 프로그램을 폐지하거나 건전한 공영성이 담보되는 프로그램으로 편성해야 한다.

(2)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방안 : 수신료 자율납부 또는 선택적 유료

KBS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방안은 수신료를 자율제나 선택제로 바꾸는 방법이다. 즉 KBS내에서 제작진과 사측이 합의한 방송의 내용에 대해 시청자가 서비스를 유료로 구매하는 방법이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KBS에 있는 정부 지분을 모두 매각하고 KBS를 미국의 공영방송PBS처럼 펀딩이나 후원에 의해 운영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방법이다. 그렇게 되면 KBS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지지내지는 후원하는 시청자들을 수요자로 둘 수 있기에 정치권력에 간섭받을 이유가 없게 된다. 향후 지상파 디지털이 보편적 서비스가 되면 셋톱박스를 통해 KBS시청 신청을 개별적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러한 시청자에게 KBS는 수신료를 공영방송의 서비스 대가로 받으면 될 것이다.

나가며 

한국방송 KBS는 ‘국민의 방송’을 모토로 내세우고 있다. 국민이라는 개념은 헌법적 개념이며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우리 헌법이 채택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것이므로, KBS가 국민의 방송인 이상, 헌법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방송을 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언론의 자유와는 상관이 없으며, 언론의 자유란 누구나 언론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일 뿐, 그것이 공영방송이라는 책무를 넘어서서 제작자의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따라서 KBS한국방송은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에 충실해야 하는 의무를 국민이 부담하는 준조세인 수신료로부터 부여받게 된다. 

만일 KBS한국방송이 그러한 의무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면 수신료를 포기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프로그램에 후원할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펀딩을 해서 공영방송 서비스를 하면 된다. 

공영방송은 근대 계몽주의와 국민국가주의의 유산이다. 이 부분은 최소화 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공영방송법을 제정해서 모든 방송사들을 대상으로 공영적 프로그램을 하겠다는 제안을 심사해 프로그램 단위로 수신료를 지원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공영방송을 KBS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도 과거 관제, 관치시대의 유산이며 자유롭게 경쟁하는 방송시장에서는 시장의 원리로 천박한 방송들도 범람하겠지만, 지금보다 더 유익한 방송도 등장하게 된다. 시청자는 각자 자신의 취향에 맞는 방송을 보면 될 일이고, 제작자의 이념과 가치관이 투영된 방송을 공영방송이라는 이름 때문에 보지도 않으면서 비용을 지불하는 제도는 더 이상 그 당위성을 주장할 수 없다. 공영방송의 방송은 공공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전 KBS PD


1) 2011.04.11 <문화재청 홈페이지 : 경성방송 개국의 역사와 의미>

2) 라디오 혁명, 2013. 2. 25., 커뮤니케이션북스

3) 백미숙(2007년) 라디오의 사회문화사. 유선영 외.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307~380쪽). 서울: 한국언론재단.

4) 홍두표(1997.). 『한국방송 70년사』. 한국방송협회.

5) 홍두표(1997.). 『한국방송 70년사』. 한국방송협회.

6) 한국 방송과 규제 법령, 2015. 11. 1., 커뮤니케이션북스

7) 한국방송협회(1997년) 『한국방송 70년사』. 서울: 한국방송협회·한국방송공사

8) 한국 방송사, 2013. 2. 25., 커뮤니케이션북스

9) 시사주간 <미래한국> 2014.2.9/ KBS 수신료는 더 이상 강제 될 수 없다


< 참고문헌 >

문화재청 홈페이지 : 경성방송 개국의 역사와 의미
한국 방송사, 2013. 2. 25., 커뮤니케이션북스
홍두표(1997.). 『한국방송 70년사』. 한국방송협회.
라디오 혁명, 2013. 2. 25., 커뮤니케이션북스
백미숙(2007년) 라디오의 사회문화사. 유선영 외.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307~380쪽). 
서울: 한국언론재단.
한국방송협회(1997년) 『한국방송 70년사』. 서울: 한국방송협회·한국방송공사
시사주간 <미래한국> 2014.2.9


(이 글은 16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한국방송개국 90주년 기념 세미나, '응답하라 한국 방송: 한국 방송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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