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들어 독자적으로 남북협력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지난 3년동안 고수해온 북미관계의 중재자 또는 촉진자에서 탈피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나중에 북미 사이를 중재 또는 촉진할 기회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면서 지금은 남북 간 할 수 있는 교류협력을 시작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이런 발언에 북한의 반응이 나오기를 기다릴 새도 없이 국내에서 문재인정부가 5.24 대북제재 조치를 해제할지 여부가 주목받았다.
정부는 이번에 5.24조치는 이미 실효성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우리정부가 북한에 대해 취하고 있는 유일한 단독제재인 5.24조치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문화 선언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번에야 말로 5.24조치 해제를 공식 선언해야 한다”란 주장이 나오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 대한 사과도 없는데 명목상으로나마 유지해야 한다”며 해묵은 논쟁이 벌어졌다.
문재인정부가 5.24조치를 공식 해제하지 못한 이유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또 이에 못지않게 천안함 폭침 희생자의 유가족을 비롯한 국내 여론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북미 간 교착 상태를 불러온 지난해 2월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유도 대북제재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5.24조치의 딜레마는 현재 남북관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일 수 있다.
5.24조치가 안보리 대북제재와 비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북한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현 정부도 공식 해제 선언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북미관계보다 더욱 복잡한 실타래를 쌓아온 남북관계의 본질을 들여다볼 시점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번에 통일부가 밝힌 대로 5.24조치가 시행된지 10년동안 역대 정부마다 예외적 적용을 해온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이미 실효성을 상실했다”는 이번 정부의 발표는 타당하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정부의 이런 발표가 북한에 대해 유의미한 메시지로 작용할 것이냐이다.
통일부의 5.24조치에 대한 발언은 올해 들어 문 대통령이 독자적인 남북협력 추진 공표의 연장선에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연설에서 “북미대화만 바라보지 말고 남북 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별관광, 남북 철도연결사업, 보건의료협력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한달 가까이 북한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고, 지난해 4.27판문점선언 1주년과 9.19평양선언 1주년에 이어 올해 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도 남한 홀로 기념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절이었던 지난 1일 평안남도 순천린(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노동신문이 보도했다./평양 노동신문=뉴스1
문제는 남한이 북한에 줄 수 있는 것과 북한이 요구하는 것이 일치하지 못한데 있다. 뒤늦게 문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당사자로 역할을 모색하고 있지만 북한은 이미 기대를 접은 것 같다.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북한이 원하는 것은 제재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남한이 해줄 역할이 없다는 것을 북한은 알고 있다.
북한 입장이 돼서 문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협력사업을 따져보자면, 북한 개별관광의 경우 북한이 얻을 경제적 이익이 높지 않고, 현실성도 떨어진다. 중국 여행사를 통한 개별관광이든 남북이산가족의 금강산관광이든 북한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에도 북한은 마지못해명절 계기 이산가족상봉을 했고, 그마저도 인원수를 제한해 치렀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또 미국에 막혔던 남북 철도연결사업을 이번에 정부가 다시 밀어붙이면서 “대북제재에 공공재는 예외”라는 논리를 대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유엔 안보리가 이를 인정하더라도 지금까지 드러난 북의 태도를 볼 때 남북관계의 동력이 되기 힘들어 보인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통일부장관을 지낸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도 “평양까지 KTX를 연결하자”고 주장한 것인지 모르겠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착안한 남북 간 보건의료협력은 많은 국민들이 보기에 북한이 받아들일 만한 카드였다. 하지만 중국‧러시아에도 ‘셀프 봉쇄’부터 조치한 북한은 남한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남북관계에서 무엇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부터 제대로 찾아내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지난 3년동안 남북협력에선 사실상 ‘인내의 시간’을 보낸 문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역할을 바꿀 게 아니라 북미 간 촉진자 역할을 유지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27일 연 포럼에서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은 “지금 북의 시선은 워싱턴으로만 향해 있는데 우리정부가 북미관계의 촉진자 역할을 포기해선 안된다”고 했다. 그는 “대북제재 해제가 안 되면 미국이 제시했던 종전선언이나 평화체제, 연락사무소 설치 논의를 정부가 추진해야 한다.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면서 김 원장은 “정부가 남북관계에서 가능한 것을 찾아서 성과를 내보겠다고 하는 것이 어떤 전략에서 나온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5.24조치를 해제한들 북한이 당장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노이회담 결렬 당시 문재인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노딜 계획을 전혀 몰랐다는 점에서 청와대 안보실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더 커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북미 간 스톡홀름회담 이후 북한은 이미 플랜B에 시동을 걸었다고 봐야 한다. 문재인정부도 막연한 기대감으로 설정한 대북정책을 점검하고, 원칙과 현실성을 갖춘 새 협상의 지렛대를 찾을 때이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